“과학은 상상력 아닌가?” 어린 시절 종종 그려내 당선됐던 과학 상상화 속에 난 늘 우주 저 먼 곳이나 바다 속 깊은 곳의 외계 생명체를 그려냈다. 저 해저 속에 우주 외계인, 지구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는 지 모르는 곳의 궁전…상상하는 게 자유인 것, 그것이 과학 같았다. 그런데, 크면서 느낀 과학은 좀 달랐다. 과학만큼 명료한 학문이 없었다. 작게는 학교 시험 문제에서부터 그랬다. 내놓을 수 있는 답이 여러 개인 인문학과 달리, 과학에는 늘 정확한 ‘답’이 있었다. 곽방tv를 진행하면서 늘 나의 한계로 돌아오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상상력을 동원한 대답 속에 돌아오는 ‘정답’은 정 없다고 느껴질 만큼 명료했다. 과학에서 ‘명료함’이 상식이라면 그 상식을 깨는 것이 내게는 ‘양자역학’이었고 그래서 양자역학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세상을 지배하는 네 가지 힘이 있다. 전자기력, 중력, 강력, 약력이 그것이다. 강력과 약력 이 두 가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느낄 일이 없으니 일단 제외하도록 하자. 이제 중력과 전자기력이 남는다. 여기서 중력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가 느끼는 이 세상 모든 힘은 전자기력이다. 두 자석이 끌어당기는 힘, 수많은 가전제품들을 움직이는 전기의 힘, 곽방tv팀이 강연에 가서 종종 이야기하는 사례 중 하나인 ‘키스를 하는 힘’도 바로 이 전자기력의 힘이다. 입술과 입술 사이의 전자가 마찰을 일으키며 우리가 서로의 입술의 감촉을 느끼는 것이 키스이기 때문이다. 전자기력의 핵심은 전자다. 양자역학은 이 세상의 모든 전자의 운동과 구성, 성분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양자역학은 그래서 우리 생활에 중요하다.
양자역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설명할 수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곽방tv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다행인 건 양자역학은 우리 같은 문과생들에게만 어려운 주제는 아니다.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고 후에 언급할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면서 머리가 어지럽지 않으면 이해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양자역학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어차피 우리는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주제이니 한 번 쯤 받아들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왜 어려울까? 를 통해 그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해보도록 하자.
첫번째 이유는 ‘상식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양자역학의 반대는 고전역학이다. 고전역학의 이치는 간단하다. 어떤 물질의 위치와 속도를 통해 이 물질의 다음 위치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뉴스에 종종 나오는 미사일을 생각해보면 안다. 현재 위치와, 그 미사일의 예상 속도를 알기에 어디로 추락할 것인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고전역학은 한마디로 과학의 합리적 예언이다. 위치와 속도 이 두 가지만 알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선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두번째 이유인 ‘작은 크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양자는 아주 작은 수준의 전자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눈으로도, 현미경으로 보기 힘든 것의 위치와 속도를 어떻게 쉽게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양자역학의 세번째 어려움은 ‘텅 빔’에 있다. 힘이 비었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실 여러분들께 원자 모형을 상상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동그란 모양의 원자와 그 주위를 타원형으로 돌고 있는 전자들의 모형을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원자와 전자는 우리 세상 물질의 기본 구조다. 1913년 닐스 보어라는 과학자는 원자의 중심부에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궤도운동하고 있다는 이 현대적 이론을 제시했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 듯 질량이 거의 없는 달 같은 전자들이 원자를 도는 것이다. 그림으로만 보면 전자와 원자의 사이는 아주 가까워 보인다. 원자핵은 움직이지 않고 전자만 아주 가까운 주위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실상은 좀 다르다. 여러분의 손에 지름 5cm짜리 동전 크기의 원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원자를 도는 전자는 어디에 있을 것 같은가? 아마 5km 바깥에서 동전을 돌고 있을 것이다. 그 5km 사이는 그럼 무엇이 채우고 있을까?
빈 공백이다. 말도 안된다고 느껴지는가? 전자가 그 먼 곳을 도는데 불구하고 전자의 반발력 때문에 그 수킬로미터의 공간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양자역학의 세계는 사실상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그저 빈 허공을 휘젓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물론, 이 세계 대부분의 물질들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우리는 꽉 찬 세계를 사는 것 같지만 사실 텅 빈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양자역학이 어려운 마지막 이유를 말씀드리겠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회의’에 아인슈타인을 골치 아프게 만든 과학자 한 명이 등장한다. 바로 원자 이론을 만든 ‘닐스 보어’였다. 이 자리에서 보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코펜하겐의 해석’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은 이렇다.
1. 입자의 상태는 파동에 의해 결정된다.
2. 모든 물리량은 관측이 가능할 때 의미를 가진다. 즉 관측 작용의 영향을 받는 값이다.
3. 전자와 같은 입자들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진다.
이해하기 어려울 여러분들을 위해 예로 바로 넘어가도록 해보자.
벽에 축구공 한 개가 통과할 만한 두 개의 틈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 축구공을 집어 들어 던져본다. 축구공은 우리 상식으로는 형태를 갖고 있는 ‘입자’이기 때문에 이 중 하나의 틈을 뚫고 나가거나 아니면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이게 입자의 특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 형태의 소리라면 모를까 형태를 가진 축구공은 ‘통과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거나’ 절대 이 둘 외의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축구공을 던졌는데, 이 공이 순간적으로 작은 연기처럼 흩어져서 두 틈을 넓게 뚫고 나간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 흔적은 입자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멋진 간섭무늬를 벽에 남겨놓았다. 놀라서 벽 뒤로 가본다. 설마 축구공이 산산조각이 나 날아간 것일까. 왠 걸, 축구공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지런히 한 지점에 놓여있다. 멀쩡한 축구공을 발로 찼고, 우리도 모르는 순간 멋진 파도 무늬를 남기며 유유히 벽을 뚫고 나갔다고 추측되는 이 축구공은 벽에 닿는 순간 다시 멀쩡한 축구공 입자가 되어 우리를 맞이한다. 이게 바로 코펜하겐의 해석이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이를 관찰하기 위해 무언가 조작을 하는 순간(우리가 파동으로 날아간 축구공을 보려고 벽 뒤를 보는 순간) 조차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과학에 왠 귀신같은 이야기냐고 반문하실 지 모른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오죽 했을까.
우리가 보는 것 자체로 결과가 달라진다니, 거기에 입자인지 파동인지도 정해져있지 않고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니. 아인슈타인에게 이 세상, 이 우주는 이미 결정된 배경이었고, 거기에 확률이란 개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해석을 보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주사위를 던지기 전까지는 1이 나올 지 6이 나올지 모른다. 철저한 확률이다. 이미 세계는 결정되어 있고 거기에 어떤 대답이 나올 지 모른다는 해석은 그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코펜하겐의 해석을 비꼰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결국 아인슈타인도 넘지 못한 양자역학의 위대함만 드러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해의 편의상 아주 큰 축구공으로 비유를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아주아주 작은 ‘양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양자의 세계는 너무 작아서 우리가 불을 켜고 그 양자를 본다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사건일 지도 모른다. 그 물질의 상태를 바꿀 만큼. 체스판을 2차원으로 보면 체스 말 한 개가 없어져도 ‘사라짐’ 이상이 될 수 없다. 사라지거나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체스판을 3차원으로 관찰하면 그 체스 말을 누가 옮기는지 어디로 옮기는 지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양자역학은 2차원 수준인 것일지도 모른다.
차원이 달라지면 신세계가 열리듯, 양자역학의 세계에도 3차원의 세계가 열린다면 그 때는 과연 누가 무슨 짓을 양자에게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