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어마어마한 자연경관 앞에서 감동하는 여행도 있고 맛을 찾아다니며 혀끝의 행복을 만끽하는 식도락 여행도 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촘촘한 계획을 세워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니는 여행도 있을 테지만, 별다른 일정 없이 그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유유자적 게으른 여행도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멋진 뷰포인트마다 예쁜 옷을 입고 인생샷을 남기는 게 중요한 여행도 있고 짜릿한 액티비티를 통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행도 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 중에서 어떤 스타일의 여행이 좋은 여행이라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내가 좋은 여행, 내가 편한 여행이 제일 좋은 여행일 뿐.
여행은 그 자체로 그저 즐거운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조건은 어쩌면 조금은 심심하고 특별히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는 것들이다. 일단 대단하고 거창한 볼거리는 없어도 괜찮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감동적인 맛집도 굳이 꼭 많을 필요는 없다. 그저 좋은 친구와 함께 유유자적 여유롭게 일상처럼 머물면서 소소한 볼거리들이 있는, 조금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소도시 여행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도시 킹스턴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지였다.
Princess St., Kingston, Canada
캐나다 토론토와 오타와 사이에는 아주 멋스러운 도시가 하나 있다.
‘킹스턴 Kingston’이라는 꽤 영국스러운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세인트 로렌스 강과 카타라키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물의 도시'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걸어서 5분이면 멋진 강변을 만날 수 있어서 이런 별명을 갖게 되었단다. 1841년부터 1844년까지 캐나다 연방의 수도였던 덕분에 지금까지도 역사적인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 마치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곳 킹스턴에서 1박 2일을 머물렀다. 그땐 워낙 작은 도시이니 1박 2일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왜 좀 더 오래 머물지 않았을까 아쉽기만 하다.
프린세스 스트리트. 킹스턴
킹스턴 시청. 캐나다
이 사랑스러운 도시를 돌아보는 가장 사랑스러운 방법을 꼽는다면 아마도 ‘빨간 트롤리 타고 동네 한 바퀴’일 것이다.
숙소에서 나와 트롤리를 타러 가기 위해서는 킹스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프린세스 스트리트를 지나야 했다. 프린세스 스트리트는 중세와 현대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거리로, 영화 트루먼 쇼에서 만든 세트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비현실적으로 오밀조밀했다. 사다리가 이어져 있는 붉은색 벽돌집들은 동화처럼 사랑스러웠고 좀 더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예쁜 차들을 가져와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해놓은 듯 자동차들마저도 거리 풍경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덕분에 트롤리를 타기 전부터 이미 여행 텐션이 한껏 끌어 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
빨간색 트롤리와 빨간색 베스트의 기사님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리를 최대한 천천히 걸어서 드디어 킹스턴의 중심, 시청에 도착했다. 캐나다 초대 수상인 존 맥도널드의 집무실도 지금까지 청사 안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니 여긴 평범한 정부 기관인 동시에 킹스턴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셈이다.
트롤리 티켓은 이 시청 건너편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구입할 수 있다.
트롤리는 중간에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는 티켓과 중간에 내리지 못하고 한 번에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티켓, 두 종류가 있었다. 한없이 게으른 여행자인 우리는 게으름의 본분을 지키고자 중간에 내리지 못하는 티켓을 선택했다.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중간에 내릴 수 있는 티켓을 살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매표소 옆 정류장으로 가니 마침 빨간색 트롤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빨간색 트롤리에 어울리는 빨간색 베스트를 입은 기사님께서 우리를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영화처럼 로맨틱한 집
트롤리는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지난 곳은 꼬불꼬불 골목의 주택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주택 앞마당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정원수를 손질하고 계셨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일상의 안온한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딱 한 번 만나게 될 낯선 여행지의 낯선 풍경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내가 만약 캐나다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 이 순간 저 자리에서 그녀 대신 나무 손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빨간 트롤리를 타고 동네 구경을 마친 뒤에는 마치 동네 주민처럼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마켓도 구경하면서 특별한 목적지 없이 느긋하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꼭 봐야 할 볼거리도,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는, 낯선 곳에서 마냥 게으를 수 있는 시간이 어찌나 소중하던지 이대로 시간이 잠시만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았다. 잠시만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 복잡한 인간관계도 없이 그저 지금 여기의 순간에만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찰나의 여유야말로 여행이 주는 비교 불가의 매력일 것이다.
빨간 셔츠를 차려입은 연주자 어르신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 어렴풋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소리를 따라가 보니 마을 어귀 작은 광장에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있었고 나와 비슷한 결을 지닌 게으른 여행자들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서 왔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만큼은 모두가 동네 사람들처럼 모여앉아 그저 음악에 취할 시간인 것을.
따뜻하고 불그스레한 저녁 무렵의 노을빛 햇살이 광장을 비추고 있었고 딱 알맞게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어르신 연주자들이 들려주시는 음악이 마치 저녁노을처럼 마을 곳곳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광장에 모인 사람들 역시 대부분 나이가 꽤 있으셨던 기억이다.
이 한없이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시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음에도 마치 내가 원래부터 킹스턴의 동네 주민이었던 것처럼 마음이 편하고 익숙했던 건 음악이 주는 힘이었을까? 아니면 느긋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만들어 준 행복한 착각이었을까?
해질 무렵 킹스턴의 골목길
사실 킹스턴에는 나이아가라 폭포나 밴프의 레이크 루이스처럼 가슴 뛰는 볼거리는 없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만큼, 어떻게든 꼭 보고 싶은 욕심을 갖게 하는 거창하고 유명한 볼거리도 없다.
하지만 이처럼 꼭 해야 할 것도, 꼭 봐야 할 것도 없는 곳이라서 난 킹스턴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 작고 소박한 도시에서 사람들의 느긋한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잠시 기대어 앉아 쉴 수 있었던 1박 2일의 시간이 참 좋았다. 이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즐겼던 킹스턴에서의 시간 덕분에 오늘의 일상을 여행처럼 즐길 수 있는 힘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익숙하고 느긋했던 킹스턴에서의 시간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