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넘실거리는 작은 섬. 일본 시코쿠 나오시마

마음에 울림을 주는 거대한 섬 갤러리

by 신서희
쿠사마 야요이 전시관. 브리즈번 현대미술관. 호주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호주 브리스번의 현대미술관이었다.

눈부시게 강렬한 색감에 끌리다시피 들어간 그녀의 전시는 충격에 가까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1929년생 할머니지만 일본 팝 아트의 거장인 그녀, 쿠사마 야요이 Kusama Yayoi의 작품 세계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일본의 시코쿠에서 그녀의 작품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전시회가 아닌 거대한 조형물이었으며, 그녀 혼자가 아닌 여러 예술가가 함께 예술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일본 시코쿠의 작은 섬 나오시마 直島 Naoshima에서였다.

'예술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나오시마 섬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조형물이 있는 베네세 하우스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의 지추 地中 미술관, 우리나라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이우환 미술관, 센토의 아이러브유 목욕탕, 빈집 프로젝트 등 여러 갤러리와 예술 작품들이 모여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한 마디로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미야노무라 항구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아이러브유 목욕탕


시코쿠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다카마츠에서 페리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나오시마 섬의 미야노무라 Miyanomura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었다. 이미 호주에서 그녀의 빨간 호박을 만났던 터라 마치 아는 동네에 온 듯 반가웠던 기억이다.

빨간 호박을 지나 동네로 들어서면서 나오시마 섬의 대표 명소 중 하나인 세토의 '아이러브유 목욕탕'을 만날 수 있었다. 목욕탕 외부도 충분히 독특했지만, 진짜로 아름다운 건 목욕탕 내부란다. 마음 같아선 목욕탕 내부도 볼 겸 여유롭게 목욕까지 즐기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을 기약하며 이번엔 외부만 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원래 여행이란 아쉬운 여지를 두는 게 제맛이니까.



나오시마 섬의 각 스폿을 연결하는 셔틀버스
빈집 프로젝트
빈집 프로젝트의 골목
혼무라 지역의 주택들
곳곳에 숨어있는 디테일의 미학


나오시마 섬은 여행자들의 이동을 돕기 위해 섬의 각 명소를 잇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 귀염 돋는 셔틀버스를 타고 먼저 혼무라 Honmura 지역으로 향했다.

6채의 주택을 갤러리로 개조한 빈집 프로젝트를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결국 이곳도 내부 관람은 포기하고 골목만 휘리릭 둘러보는 걸로 급변경.

사실 나오시마 섬에 갤러리가 많다 해봤자 워낙에 조그마한 섬이니 꼼꼼히 둘러봐도 하루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당일로 일정을 잡은 거였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여긴 하루 만에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최소 1박 2일, 여유가 된다면 3~4일 이상 머물면서 예술적 에너지를 제대로 맛보았어야 하는 거였다.

역시 여행이란 아는 만큼, 준비한 만큼 보인다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하며 이번엔 그냥 사전 답사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비록 겉만 휘리릭 둘러보았을 뿐이지만, 빈집 프로젝트의 갤러리들이 모여있는 골목은 오밀조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골목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문패 하나까지도 신경 써서 제작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굳이 거창한 갤러리들을 돌아보지 않아도 나오시마 섬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도, 별것 아닌 평범한 빈집을 힐끗 엿보아도 마치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베네세 하우스의 노란 호박
베네세 하우스의 작품들


베네세 하우스 Benesse House는 럭셔리한 호텔 & 리조트 단지이지만, 우리에겐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있는 야외 조각공원으로 유명하다. 빨간 호박은 섬의 입구 격인 미야노무라 항구 앞에, 그리고 노란 호박은 바로 이 베네세 하우스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베네세 하우스엔 노란 호박 외에도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많다는데, 예술을 잘 모르는 나는 누구 작품인지도 모른 채 그저 "좋다!! 멋지다!!" 감탄사만 연발하며 공원을 거닐었다.

그곳에 얼마나 머물렀을까. 넋 놓고 느릿느릿 산책을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고 어느새 마지막 배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오시마 섬의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 자전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학생들


그제야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결국 이우환 미술관은 건너뛰고 마지막 코스였던 안도 타다오의 지추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지도에 도보 30분이라고 나와 있는 거리를 거의 경보 수준으로 달려 20분 만에 지추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도 이런저런 예술 작품이 곳곳에 눈에 띄었으나 눈물을 머금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오시마 섬에서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어서 여행자가 이용하기엔 다소 불편했고, 걸어서 다니기엔 다소 멀어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러니 자전거를 대여해서 타고 다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건데, 우리는 그조차도 몰라서 내내 발을 동동거리면서 뛰어다녔던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지추 地中 미술관 Chichu Art Museum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작품들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단,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일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으로 남길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곳은 바로 순백색으로 되어있던 어느 전시관이었다.

전시 방향을 따라 느린 걸음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걷고 있는데, 문득 위아래로 새하얀 옷을 입은 스탭이 지나가는 우리를 불러 세웠다. 다짜고짜 여기에서 하얀 슬리퍼로 신발을 바꿔 신으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시키는 대로 하얀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오른쪽에 있는 하얀색 문으로 들어가란다.

대체 무슨 전시이길래 이렇게 거창한 절차를 거쳐 들여보내나 싶은 궁금함에 우리는 순순히 오른쪽 하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거기에는 모네의 작품인 <수련> 연작 중 5점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여러 나라의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모네의 작품을 봤지만 그런 전율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방, 순백색 벽,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하게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모네의 작품은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신비롭고 감동적이었다.

같은 작가의 같은 작품이라도 어떻게 전시하느냐에 따라 그 감동이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그렇게 모네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나오시마 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지추 미술관의 여러 전시관과 공간들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내내 안도 타다오는 천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 베네세 하우스 앞
어디에서나 만나는 자전거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는 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지추 미술관을 나온 우리는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 가까스로 다카마츠로 돌아가는 마지막 페리를 탈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미술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모네의 작품을 본 것만으로도 뭔가 가슴이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낡은 철광석 제련소가 방치되어 있었던, 쓰레기로 뒤덮였던 버려진 섬 나오시마가 지방 정부의 문화 프로젝트로 이렇게 멋진 명소로 변신했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영국의 여행 잡지 <Traveler>로부터 '꼭 가봐야 할 세계 7대 명소'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니 정말이지 드라마틱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과하지 않고 덜하지도 않은, 자연과 멋지게 어우러진 예술의 섬 나오시마.

비록 이번엔 준비가 부족하여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후루룩 둘러볼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쉽지만, 그 덕분에 나오시마 섬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게 된다면 그땐 꼭 여유로운 일정으로 가서 꼼꼼하게 마음으로 만지듯 그곳에 조금 오래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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