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그린델발트 피르스트 하이킹
스위스에 도착한 이래로 내내 날씨가 눈부시게 화창했기 때문에 왠지 한 번은 비를 만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하필 피르스트 First에 가는 날일 줄은 몰랐다.
피르스트는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어서 특히 유명한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날 중에서 유일하게 딱 하루 액티비티를 하는 날 비가 오냐는 말이다.
일기 예보가 틀리기를 간절히 기도했건만, 아침 일찍부터 창밖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어차피 액티비티도 못하는데 피르스트는 패스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일정을 접긴 아쉬웠다. 그나마 장대비가 아닌 가랑비인 걸 감사하자 마음을 다독이며 곤돌라 탑승장으로 향했다.
과연 우리는 이 빗속에서 피르스트를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갈까 말까 여러 번 망설이다가 도착한 피르트스 행 곤돌라 탑승장. 궂은 날씨 탓인지 여행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행자들이 피르스트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액티비티를 즐기기 위함인데, 굳이 비 오는 날 피르스트에 오를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무튼, 그 덕분에 우리는 줄도 서지 않고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리 외에 탑승객이라고는 중국인 패키지 한 팀뿐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피르스트 종착역까지 가는 중간 정차역에 트로티 바이크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걸 보니 더욱 마음이 쓰려왔다.
해발 2,168m에 위치한 피르스트 First는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짚라인과 비슷한 피르스트 플라이어, 절벽 옆을 걷는 클리프 워크, 자전거와 비슷한 트로티 바이크가 대표적인 3종 액티비티.
날씨만 좋았더라면 이 세 가지 액티비티를 다 해보고 싶었는데, 날은 도통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 오는 하늘을 뚫고 피르스트에 도착하니 원망스럽게도 빗줄기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거세졌고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짙게 덮여있었다.
괜히 올라왔나 싶을 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씨에 한숨만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빗속을 뚫고 클리프 워크 전망대에서 인증샷은 겨우 한 장 찍었지만, 더이상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바깥은 우산을 쓰고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워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일단은 1층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최대한 천천히 느릿느릿 아껴가며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커피는 무척 맛있었다.
그렇게 30분쯤 기다렸을까. 창밖을 봐도 여전히 온통 회색빛.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 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아무래도 다음에 피르스트 보러 스위스 다시 오라는 뜻인가보다" 이야기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곤돌라를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클리프 워크 입구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고 가자 싶어 밖으로 나섰는데....
놀랍게도 날씨가 개고 있었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지만, 안개도 걷혔고 시야도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액티비티는 못해도 하이킹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액티비티와 더불어 피르스트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하이킹이다.
바흐알프제 호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왕복 2시간 코스가 그것. 조금 빠르게 걸으면 1시간 30분 만에도 왕복이 가능한, 난이도 하(下)의 하이킹 코스였다.
우리는 참고 기다려보길 잘했다며 신이 나서 하이킹 준비를 시작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1층의 기념품 상점에서 우비도 구입했다.
막상 하이킹을 시작하니 우리처럼 비가 그쳐가는 걸 보고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안개는 빠른 속도로 걷히기 시작했고 빗줄기도 점차 가늘어졌다. 구름이 걷혔다 가렸다를 반복했지만, 가는 길이 너무 벅차게 아름다워서 비가 좀 내려도, 구름이 좀 가려도 괜찮았다. 오히려 비 온 직후라 풀 향기는 한층 짙어졌고 날씨도 가을날처럼 서늘해져서 걷기에 딱 좋았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찌나 즐겁게 걷던지 그들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걸으면서도 내내 이 시간이 올 줄 모른 채 비 온다고 그냥 내려갔더라면 어쩔 뻔했냐는 말을 끝도 없이 되풀이했을 만큼 이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우리는 드디어 반환점인 바흐 알프제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무척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호수 옆에는 마치 그림처럼 작은 오두막 산장이 있었다.
제법 서늘한 날씨에 비도 좀 맞은 터라 약간 오슬오슬했던 우리는 산장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산장 안에는 작은 벽난로가 있었고 대여섯 명의 여행자들이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친절하게도 훈남 서양 여행자 한 명이 멋진 비주얼로 벽난로에 나무를 넣어주었다. 나무는 타닥타닥 소리와 나무 타는 냄새와 빨간 불빛으로 작은 산장에 따뜻한 온기와 아늑한 느낌을 한껏 더해주었다.
세상에, 이토록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라니, 그 로맨틱함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한없이 따뜻하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산장 분위기에 반한 우리는 한참을 모닥불 주위에 앉아 영화 같은 순간을 만끽했다.
돌아가는 길엔 날씨가 더 맑아졌다.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도 아까보다 더 많아졌고 온도도 높아져서 조금 덥기까지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거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과 분위기에 마치 새로운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역시 스위스의 비교 불가 최고의 매력은 하이킹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다시 곤돌라 탑승장으로 돌아오자 맑게 갠 날씨에 클리프 워크 Cliff Walk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까는 안개에 뒤덮여 전망대 끝부분만 겨우 보였는데, 이젠 모든 코스가 완벽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세 개의 액티비티 중, 클리프 워크만이라도 걸어볼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클리프 워크는 생각만큼 무섭진 않았다. 발아래가 투명한 크리스탈 바닥이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거나 떨리진 않았다. 그저 이 아찔한 절벽을 유유자적 걷는다는 감격만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비 오는 시간을 참고 기다린 후에 만나서 그 절벽이 무섭기보단 한없이 아름답게 기억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마터면 이처럼 아름다운 우중 하이킹을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커피가 맛있어서, 우리의 수다가 즐거워서 비가 그치기를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피르스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우리에게 기대 이상의 청량한 하이킹의 시간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피르스트의 날씨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고, 비가 그친 후에 찾아온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마음에 차곡차곡 담을 수 있었다.
스위스 여행 내내 걸었던 수많은 하이킹 코스 중에서 유독 이 피르스트에서의 짧은 하이킹과 산장에서의 불멍 타임이 기억에 남았던 건 어쩌면 아침 내내 쏟아진 장대비와 짙은 안개, 그리고 회색빛 하늘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여행에서 비를 만난다는 건 여행의 의욕을 꺾고 포기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날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과 멋을 경험하게 해주는 특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피르스트의 액티비티는 클리프 워크밖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신비로운 회색빛 피르스트부터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고 초록빛이 반짝거리는 피르스트까지, 그야말로 스펙타클한 피르스트의 매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회색빛 하늘과 거센 빗줄기 덕분에 피르스트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졌고, 그 간절함 덕분에 비가 그친 후의 하이킹이 그토록 감격스러울 수 있었으니 오히려 때맞춰 내려준 비에 감사해야 하려나.
역시 여행은 모든 순간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