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방비엥,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모로코 마라케시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2019년에 방영되었던 jtbc의 '트래블러’ 쿠바 편을 보면 쿠바 아바나 근교의 작은 도시 비날레스에서 하루종일 멍때리는 시간을 보내는 배우 류준열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저 동네를 느릿느릿 산책하다가 숙소의 옥상에 앉아 해가 지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던 류준열은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여행에서 멍때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에 대해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시간 동안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인생을 계획할 수 있기에 여행지에서의 그런 시간은 꼭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야말로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그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을 만큼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도 여행을 갈 때마다 그런 시간을 통해 늘 한 뼘씩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굳이 휴식하라고 멍석 깔아주는 휴양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잠시 편입할 수 있는 공간에서 보내는 '멍때림의 시간'은 나에게 휴식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곤 했다. 하나라도 더 많이 보려고 시간을 촘촘히 쪼개서 부지런히 다니는 여행도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겠지만, 때로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낯선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여행이 주는 회복과 충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여행을 다니던 초창기에는 시간대별 계획까지 꼼꼼하게 세워서 하나라도 더 둘러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여행을 제대로 한 것 같았고 돈을 투자한(?) 보람이 있는 듯하여 뿌듯했다. 자유여행이지만 패키지 관광을 방불케 하는 강행군 일정을 세워놓고는 아침부터 밤까지 달리곤 했다.
하지만, 여행 경력이 점점 쌓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멍때리는 시간’의 중요성,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미학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난 일주일이 넘는 여행일 경우엔 꼭 하루나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는 시간을 갖곤 한다. 모든 일정을 멈춘 채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심심해지면 숙소 주변의 동네를 느릿느릿 산책하고, 동네의 로컬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동네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동네 주민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사실 일상에서도 늘 바쁘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여행까지 가서 정해놓은 시간표대로 숙제하듯 바쁘게 다니면 그건 그저 패키지 관광이거나 바쁜 일상의 연장일 뿐이니 말이다. 철저하게 머리를 비운 채 몸과 마음을 온전히 이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여행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처럼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늘 하루나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때림의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세 곳의 여행지를 떠올려본다.
01. 라오스, 방비엥
나에게 잠시 멈춤의 미학을 처음으로 맛보게 해준 곳은 바로 라오스였다.
다행히 난 라오스를 꽤 오래전에 다녀왔기 때문에 내가 갔을 때만 해도 관광지 특유의 시끌벅적 복잡한 분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덜했더랬다.
물론 당시에도 방비엥은 라오스를 대표하는 액티비티의 도시답게 골목마다 수많은 게스트하우스가 'Cheap Price' 간판을 내건 채 여행자들에게 손짓하고 있었고, 레스토랑에서는 요란한 팝송이 울려퍼졌다. 여행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는 카약킹 투어, 튜빙 투어 등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호객 행위에 열중했으며, IT 강국 대한민국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PC방에는 나라별 언어를 다 지원한다는 광고문구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 여행자들은 이처럼 편리하면서도 한없이 저렴한 방비엥에서 지칠 때까지 밤새도록 즐기고 맹렬히 달렸다.
언뜻 보기에 방비엥은 멍때리기 좋은 여행지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왁자지껄함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은 바로 방비엥의 눈부신 자연이었다.
쏭강의 아름다운 풍경과 소박한 작은 마을 분위기는 복잡한 생각을 일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주위에 대단한 볼거리나 유명한 관광명소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동네였다. 덕분에 난 매일 아침 동네 어귀의 국수집에서 먹는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시작해 동네 작은 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오후에는 쏭강을 천천히 산책하는, 지극히 단순한 일상 여행자로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
액티비티를 즐긴다면 방비엥이 왁자지껄한 핫 스폿으로 느껴질 테고 클럽을 좋아한다면 방비엥의 화려한 밤 문화가 반갑겠지만, 그 모든 걸 마다하고 그저 소박하게 동네 주민으로 잠시 살아보고자 한다 해도 라오스의 작은 마을 방비엥은 충분히 멍때리기 좋은 여행지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방비엥이 가슴 먹먹하게 그리운 건 아마도 그곳의 소박하고 따뜻한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치유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02. 볼리비아, 페루 티티카카 호수
한 달간의 남미 여행을 갔을 때, 우리는 중간 지점인 볼리비아와 페루 사이 티티카카 호수에서 4박 5일 동안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잠시 태양의 섬 트레킹을 다녀오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저 매일 호수를 산책하고 동네를 걷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4박 5일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런 할 일이 없음에 마음이 편해졌고 날이 저물면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아쉬웠다. 돌이켜 보면 멍때리는 시간이 이토록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던 건 티티카카 호수가 단연 최고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티티카카 호수에서 보낸 시간은 조금 긴 여행에서는 중간에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투자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만약 그때 그렇게 멍때리는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이후 일정인 페루에서 조금 덜 행복했을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멈추고 충분히 게을렀던 그 5일의 시간 덕분에 우리는 컨디션도 회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나온 여정들을 다시 찬찬히 돌아보고 남은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었으니 이래저래 그 시간에 감사할 수밖에.
03. 모로코 마라케시
사실 애초에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를 생각은 아니었다. 마라케시에서는 모로코 여행의 하이라이트 코스인 사하라 사막 투어를 다녀올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갑자기 모로코에 이상 한파가 불어닥치는 바람에 침낭이나 두꺼운 옷을 챙겨오지 않은 우리는 도저히 사하라 사막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과감하게 사하라 사막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리 사하라 사막 투어가 모로코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오들오들 떨면서까지 사막에 가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여행은 즐거우려고 하는 건데, 뻔한 고생을 예상하면서 사하라 사막에 가야 하나 싶은 마음에 그냥 가지 말자고 결정해버린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때 너무 과감하게 고민도 하지 않고 사하라 사막을 포기해버린 게 조금 아쉽긴 하다. 앞으로 마라케시에 다시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래도 말로만 들었던 사하라 사막에 발이라도 한번 내디뎌 보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무튼, 그렇게 고민 없이 사하라 사막 투어를 포기해버린 바람에 우리는 마라케시에서 무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의 교통편과 숙소를 이미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갑자기 일정을 변경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마라케시에서 멍때리는 시간을 갖게 된 셈이다.
다행히 마라케시는 멍때리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번번이 길을 잃을 만큼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들은 늘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고 저녁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야시장이 열리는 제마 엘프나 광장은 매일이 축제였다.
물론 마라케시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방비엥이나 티티카카 호수와는 달리 왁자지껄 정신없는 분위기였지만, 돌이켜 보면 사람 냄새 나는 그곳 또한 다른 의미로 '멍때리기 좋은 여행지'였던 것 같다. 매일 마라케시의 신비로운 골목에서 한없이 낯설지만 한없이 흥미진진한 일상이 펼쳐졌고, 그 정신없는 일상 안에서 나도 덩달아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소위 멍때리기 좋은 여행지가 반드시 조용하고 소박한 시골 마을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왁자지껄하면 왁자지껄한 대로 그 분위기가 주는 '멍때림의 미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어디에서 멍때리느냐가 아니라 여행지에서 일정 정도의 물리적 시간을 통째로 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확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때리는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비우고 거기에 무엇을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뭔가를 채울 필요 없이 멍때림의 시간을 통해 그저 나를 오롯이 비워내기만 해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비웠을 때 비로소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평안과 홀가분함이야말로 여행에서의 멍때리는 시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힐링이자 회복일 테니까.
여행의 정점에서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일정을 후루룩 놓아버림으로써 진짜 여행의 맛을 누릴 수 있는 그 언젠가의 날이 속히 오기만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