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하나 가난한 혼돈의 민낯. 볼리비아 라파즈

뜻밖에 여행하기 좋은 도시

by 신서희


남미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라파즈에서 2박 3일을 계획한 걸 보고 이미 남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를 말렸다. 공기도 나쁘고 고도도 높고 치안도 좋지 않고 볼거리도 별로 없는 라파즈에서 왜 이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도시에서든 적어도 2~3일은 머무르는 게 나의 여행 스타일이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친구 중 한 명이 라파즈 근교의 티와나쿠 유적을 꼭 보고 싶어 했기에 우리는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라파즈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로 했다.


라파즈 La Paz는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로서 해발 3,600미터의 경사진 언덕 위에 비스듬히 위치한 독특한 지형을 갖고 있다.

사실 라파즈는 여행하기에 그다지 좋은 도시는 아니다. 반면 뜻밖에 여행하기 좋은 도시이기도 하다.

일단 도시에 대한 첫인상은 예상했던 대로 나쁜 쪽에 가까웠다. 고도가 높아서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차는 건 기본인데다가 안데스 고원 중심에 위치한 분지 도시이기 때문에 공기 순환이 거의 안 되는 편이었다. 이런 지형이다 보니 차량도, 사람도 바글바글 뒤엉켜있는 상태에서 도시 전체에 짙은 매연이 숨 막힐 듯 두껍게 덮여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볼리비아의 다른 도시에 비해 물가는 비싸고 치안은 안 좋기로 악명이 높으니, 이쯤 되면 라파즈에 최대한 짧게 머물라는 남미여행 경험자들의 조언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간판도 가판대도 딱 라파즈
볼리비아의 전통의상을 입은 아주머니
가파른 언덕이 유독 많았던 라파즈 시내


호텔에서 체크인 수속을 끝내고 호텔에 소속되어 있는 여행사에서 다음 날의 티와나쿠 유적 투어까지 신청해놓은 뒤, 본격적으로 동네 구경에 나섰다.

듣던 대로 라파즈 시내는 정신없고 복잡한 대혼란 그 자체였다.

도로에는 낡은 버스를 위시한 각종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다녔고 좁은 거리에는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치안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괜히 긴장되고 나도 모르게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실제로 모든 건물의 1층 창문마다 두꺼운 창살이 둘리어 있는 걸 보니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게 괜한 말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가르가나 거리 입구
나른한 표정의 상점 주인들
기념품과 주술재료가 뒤엉켜있는 마녀 시장


라파즈의 여행자 거리라고 불리는 '사가르나가 Sagarnaga' 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굉장히 번화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기대했건만 우리가 만난 건 번화가의 뒷골목 같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느낌의 좁은 골목이었다. 사가르나가 거리 옆으로 이어지는 Linares 토산품 골목 역시 복잡하고 정신없는 재래시장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념품 가게만큼은 정말 다양했다. 치안은 안 좋아도 쇼핑은 라파즈에서 하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알파카 제품 전문점부터 포토시의 은 전문점, 그리고 저렴한 기념품 상점까지 그야말로 볼리비아의 모든 제품이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사실 사가르가나 거리를 찾아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라파즈의 거리는 워낙 복잡하고 꼬불꼬불하며 차들도 뒤엉켜있어서 어딘가를 찾아가려 애쓰면 오히려 점점 더 길을 잃게 된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번화한 곳을 향해 가다 보면 문득 거짓말처럼 사가르가나 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뜻밖에 여행하기 좋은 도시'라는 평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라파즈 시내의 관광명소 중에는 마녀 시장을 빼놓을 순 없다.

사가르나가 거리 옆 골목에 있는 이 마녀 시장은 기괴하고 엽기적인 재료들을 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사들이 점을 보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파는 시장으로 어떤 곳에서는 죽은 라마를 팔기도 한단다. 예전에는 정말로 기괴한 재료를 많이 팔았다고 하는데,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기괴한 재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일단 마녀시장으로 들어서면 '여기가 마녀시장이구나' 하는 촉이 훅 느껴진다. 안데스의 전통 종교방식을 고수하는 라파즈만의 주술적인 에너지 덕분이려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자들과 각종 말린 꽃, 약초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상점들이 이어진다면 그곳이 바로 마녀시장이다.



라파즈의 골목들


처음에는 라파즈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초긴장 상태였지만, 쇼핑도 하며 느긋하게 걷다 보니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라파즈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남미여행을 하면서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날것 그대로의 복잡하고 낡은 B급스러운 도시 정서라고나 할까. 어디에선가 총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라파즈를 떠나던 날, 시내버스를 타고 라파즈 시내를 돌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구시가지 반대편에는 서울이나 대전 같은, 지극히 현대적이고 평범한 분위기의 신시가지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청을 비롯해 각종 고급 호텔들이 모여있는 신시가지에는 경사가 심한 언덕도 없었고 허름한 건물도, 원색의 그래피티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만(?) 보였던 오싹한 분위기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그 대신 라파즈만의 독특하고 복잡한 B급 분위기도 그곳엔 없었다.




해가 어둑어둑해지는 라파즈의 골목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키면서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구시가지의 중심인 산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에 있었던 우리는 날이 저문다는 걸 인식한 순간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호텔로 돌아가는 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여기가 아주 위험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약속한 듯 동시에 이런 오싹함을 느꼈던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우리가 호텔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날이 거의 어두워진 후였다. 호텔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입구의 보안 직원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를 호텔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문을 굳게 걸어잠근 호텔이라니, 라파즈의 치안이 좋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라파즈 시내


다음 날 저녁, 티와나쿠 유적 투어를 마치고 라파즈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전망대에 들렀다. 가장 유명한 킬리킬리 전망대보다 한 블록 아래에 있는 파차마마 전망대가 라파즈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로 꼽힌단다.

과연 듣던 대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라파즈의 전경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경은 도시의 화려함이 아닌 빈민층의 빼곡한 집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경사가 심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고원 분지 도시 라파즈에서는 빈민층일수록 고도가 높은 언덕 위에, 상류층은 낮은 평지에 거주한다. 지형의 특성상 언덕 위로 갈수록 매연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어마어마한 도시 전경의 밑바닥에는 깊은 서글픔이 깔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산등성이를 빼곡하게 메운 도시 하층민들의 집들이 라파즈의 빛나는 야경을 이루어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뷰 포인트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씁쓸해졌다.


산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가의 낡은 주택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야경이야말로 라파즈의 서글픈 민낯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빈민층 사람들이 시내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케이블카를 만들어준 덕분에 그들의 삶이 한결 나아졌다고 하니, 에보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경제 발전과 독재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그 어마어마한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행정적 능력이 부족하여 지금껏 빈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인 라파즈 역시 이런 빈곤함을 민낯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구시가지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입해온 낡은 중고 버스와 차량들이 신호등 하나 없이 뒤엉켜 총체적 난국을 이루고 있었고 사람들 대부분은 삶에 지친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나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최악의 매연과 혼돈의 현장을 목도하며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볼리비아에는 아직 희망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그들은 그 옛날 잉카 문명에 앞서 위대한 티와나쿠 문명을 이루었던 선조들의 후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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