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상황 초기만 해도 조금만 참으면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사스나 메르스 때처럼 백신을 맞고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종료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재난의 일상화 앞에 여행은 거의 중단되었고 여행을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간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여행을 멈추고 나니 비로소 나에게 여행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아는 지인들 사이에서 난 '여행 좋아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꽤 오랜 시간 여행책을 써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틈만 나면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연휴마다 어김없이 어디론가 떠나며 통장 잔고와 무관하게 일단 비행기표부터 지르고 보는 무모함까지 지녔으니 누가 봐도 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내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분명 난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여행을 갈 수 없게 된 지금도 틈만 나면 '대만 가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는 얘길 입에 달고 살면서 인터넷이나 TV에서 대만 얘기만 나와도 울컥하는 걸 보면 말이다.
가끔 궁금해진다. 대체 나는 왜 이토록 여행이 좋을까. 왜 마이너스 통장에 허덕이면서도 여행 계획 앞에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일까. 소위 말하는 '역마살' 때문인가.
아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 같다. 그리고 짐작컨대 그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오지 여행만 하는 사람도 있고, 도심의 호캉스만 즐기는 사람도 있으며, 혼행을 선호하는 사람, 패키지 여행만 가는 사람 등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여행을 사랑하며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이토록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바로 일상의 유보, 그리고 사람.
무엇보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춤하고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상을 사는 묘미야말로 여행이 지닌 가장 큰 중독성이 아닐까. 그것도 아주 심플한 일상 말이다.
평소 일상의 내 머릿속은 늘 가족, 직장에서의 업무, 여러 인간관계, 집안일, 주말의 약속, 기타 해야 할 일 등등이 복잡하게 엉켜있기 마련이다. 늘 스케줄 노트에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메모해놓고 하나씩 처리해야 안심이 된다. 직장에서의 업무에 실수가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며, 가끔씩 병원 진료도 가고 AS 신청도 하는 등 소소한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여유가 생기면 친구들에게 안부도 묻고, 또 나에게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와 반갑게 통화도 한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노력 또한 적지 않은 에너지를 요하니 이래저래 머릿속은 언제나 잔뜩 어질러진 방 같다. 기분이 좋을 때도, 우울할 때도, 즐거울 때도 완벽하게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해지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여행을 떠나면 나의 뇌구조는 완벽하게 심플해진다.
그저 어딜 갈까, 뭘 먹을까만 고민하면 된다. 해야 할 일 리스트도 없고, 신경써야 할 복잡한 인간관계도 없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할 필요 없이 오직 'Here&Now',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야말로 뇌구조가 잠시 리셋되는 셈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힐링이 또 있을까.
그러하기에 난 낯선 여행지에 가서도 그곳에서 유명한 명소를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크게 들지 않는다. 덕분에 모로코에 가서도 자타공인 하이라이트인 사하라 사막에 가지 않았고 멕시코 칸쿤에서도 해변에서의 일광욕을 해보지 못했다. 그냥 동네 구경, 시장 구경, 사람들 구경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마음이 내키고 상황이 허락한다면야 당연히 유명한 관광명소를 챙겨서 가겠지만,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굳이 무리해서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았다.
그저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일상을 살아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즘 트렌드가 혼행이라지만, 난 혼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어딜 가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람'이다. 베테랑 여행자들이 흔히 말하는 '여행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여행을 가는 여행 동행자 말이다.
내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 아무래도 난 주위 친구들에 비해 여행 가는 횟수가 많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같은 친구와만 여행을 갈 순 없었다. 그렇다고 낯선 사람과 여행을 갈 만큼 대범하진 못해서 가끔은 적당히 친한 지인과 여행을 가기도 한다. 나와 여행 합이 맞는다는 게 아직 채 검증되지 않은 친구와도 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때로는 괜히 예민해질 때도 있고 마음이 조금 상할 때도 있으며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누구의 잘못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싸우거나 큰 소리 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 기질상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지만,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마음이 힘들 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마음이 힘들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나에겐 최고의 통찰이었고 배움이었다. 여행에서 서로 민낯으로 만났을 때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내가 어떤 말과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감정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관찰하고 깨닫는 과정은 여행이 나에게 주는 아주 큰 훈련이었다.
무엇보다 여행에서는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종종 여행 동행자 친구와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발견되고 극대화되곤 했다. 그런 과정과 통찰을 통해 나는 조금씩 깎이고 다듬어져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용납되지 않았던 까칠함이 어느새 느긋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되었고, 이전에는 상대방의 잘못이라 단정짓던 부분들이 지금은 나의 예민함이 작용한 결과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틀림이 아닌 다름을 깨닫고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와 함께 여행을 해준 친구들 덕분에 나의 여행은 더욱 풍성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다.
위드 코로나를 준비하며 사람들은 서서히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직업상 아무래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게된 뒤에야 비로소 여행을 계획해볼 수 있을 테니 아직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물론 해외로 떠날 수 없는 아쉬움을 잦은 국내여행으로 달래고 있긴 하나, 국내 여행은 '일상의 유보'라는 여행의 강력한 에너지를 채워주기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있는 한, 아무리 여행을 떠난다 해도 일상이 완벽하게 유보되는 뇌구조 리셋까지는 어려우니 말이다.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부디 너무 오래 기다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다음 여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나온 여행의 추억을 되돌아보면서 사진과 글을 통해 마음으로나마 '일상 유보'의 시간을 누려보는 수밖에.
그러다 어느날 문득 인천공항 출국심사대를 통과하는 그 순간을 간절히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