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부지런하게!
2025년 1월 18일
설악산을 어떻게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겨울 빙벽 등반은 짐도 많은데 거기에 모처럼 자일을 넣었더니 몸이 자꾸 휘청거린다.
잦골이 이렇게 낭떠러지 투성이었나?
전에도 무서웠는데 눈 한점 없는 겨울 설악산 잦은바위골은 더 무섭고 험난한 길이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배낭은 바위를 오를 때마다 돌덩이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온몸을 바위에 비비며 겨우 오른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더욱 움츠러드는 나.
이게 무슨 지랄인가?
언제부터 그렇게 빙벽을 했다고 이렇게 몸과 마음을 공포의 구석으로 처박고 있나?
남들은 잘도 가는 곳들을 나만 헤매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드는 아침이다.
쫄보인 내가 스스로도 별로인데 어느 틈에 내 옆에 온 태옥씨가 겁이 나서 못 가고 있는 나를 나무란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온다.
나도 이런 내가 싫거든요.
...
그런 나를 의현 형님은 뚜벅뚜벅 앞장서 걸으며 겁 많은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준다.
형님은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 건가?
콧노래를 부르며 이 길을 오른다.
몇십 년 만의 설악이라더니 저리도 좋을까?
형님의 콧노래를 들으니 괜스레 짜증 내며 걷고 있던 내 발걸음이 부끄러워진다.
무서움에 혼이 나갈 때마다 차분한 목소리로 잠깐만 기다리라며 자일로 안전장치를 해주신다.
귀찮은 내색 한번 없이 등반 전체를 아우르며 솔선수범하는 묵직한 형님의 존재감이 빛나는 길이었다.
오전 6시에 출발해 겨우 50M, 100M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어느새 저 위에 길을 내고 있다.
따뜻한 겨울을 실감한다.
물이 줄줄 흐르는 설악산의 겨울.
그나마 좋은 빙질을 찾아 오르고 있는 형님들을 올려다본다.
언제나 동계 빙벽을 앞장서 길을 내주는 길잡이 진석 형님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태옥씨가 또 다른 길을 내주고 있다.
접근길이 험해 힘들었던 몸과 마음을 추슬러 내 차례에 이르러 얼음 위에 올라서니 또 다른 겁이 나를 사로잡는다.
자세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오르고만 있는 나.
앞서 오르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얼음 파편들.
유독 나한테만 오는 것 같다.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얼음에 계속 얼굴을 처박고 있으니 지켜보던 의현 형님이 다른 길로 가라며 일러주신다.
바보같이 치고 나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팔로만 오르니 금세 힘이 빠진다.
억지로 오르다 보니 오랜만에 잦은바위골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멋지긴 하다.
근데 무섭다. 쩝.
난 왜 온전히 즐기지를 못하고 이 모양인고?
온몸을 쥐어짜며 확보를 한다.
후등자 확보를 하는데 얼어있는 줄은 잘 따라오지 않는다.
도형 형님의 도움으로 자일을 사리며 확보를 해본다.
이렇게 도움만 받고 있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축 쳐진 마음으로 줄을 계속 당긴다.
100M 상단 마지막을 길잡이로 오르는 찬진 형님이 남긴 얼음 파편이 내 왼쪽 무릎에 퍽 떨어졌다.
살면서 두 번째로 눈앞에 별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있으니 의현형님이 "울어" 하는데 그 말이 위로가 된다.
'너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 일어선다.
상단에 올라갈 사람을 진석 형님이 이야기하는데 나도 가고 싶었는데 무릎이 얼얼해 포기했다.
도형형님이 주먹만 한 얼음이었다며 괜찮냐고 묻는데 시간이 지나니 참을만했다.
첫 빙벽 멀티등반이라는 주리씨와 컨디션 난조로 하단에서 오래 머문 진희까지.
세명 모두 구경 못한 저 위에 풍경은 다음을 기약해 보기로 한다.
다섯 시를 넘겨 마지막 등반자까지 내려와 서둘러 등반을 마무리한다.
아래에서 오래 기다린 진희의 세파란 입술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고 있다.
뭐가 그리 신나나 쳐다보니 아예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웃는다.
유진이가 준비한 발열팩 도시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 헤매고 있는 기혁 형님과 상영 형님의 대화에 배꼽 잡아 웃는다.
두 사람은 끝까지 못 먹다 태옥씨가 하강을 완료한 후에야 겨우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맛있다고 감탄까지 해가며...
사방에 어둠이 쓱 내려앉아 하산 준비를 서두른다.
걸음이 느린 나부터 더 늦기 전에...
무서운 그 길을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갑갑하다.
그런 나를 알아채고는 의현 형님이 당신 가방에 내 자일을 챙긴다.
하산길에 더 큰 민폐를 끼칠 것만 같아서 죄송하게도 내가 들고 가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기혁 형님, 상영 형님, 진희가 선두.
자일이 깔리지 않는 낭떠러지를 진희는 휙 잘도 오른다.
머뭇거리는 나를 알아채고 형님이 먼저 자일을 설치해 주신다.
그날 가장 겁 많은 나를 위해 배려하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저 고맙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랜턴 불빛에 의지에 내려온다.
걸음이 빠른 진석 형님이 어느새 내 앞에 서고 위험 구간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며 주의를 당부한다.
이렇게 받기만 하고 어쩌나.
앞장을 서도 모자란데...
후미는 잘 오고 있는지.
뒤쳐진 주리씨는 괜찮은지.
진석 형님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별들이 하나둘씩 머리 위에서 빛나고.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진석 형님이 말한다.
"혼자 갈 수 있지?"
"네"
뒤에 오는 의현 형님과 후배들의 안전이 염려되는지 형님은 거기서 더 머물고 나를 먼저 내려보낸다.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것이 낭떠러지보다는 덜 무서우니 나는 형님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탐방센터까지 혼자 걷는 길이 어찌나 멀던지 주저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꾹 참았다.
간간이 뒤에서 보이는 불빛과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후미의 안전 확인을 위해 전화를 돌려본다.
다행히 위험지대를 모두 통과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조금 안도하며 길을 걸었다.
마땅히 기다렸다가 함께 왔어야 하는데 자일도 받아 들고 오고 마중도 가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않고 먼저 내려왔다.
그게 지금까지도 내내 마음에 걸린다.
다음엔 힘들어도 기운내어 도움을 주자.
드디어 주차장.
손목 부상으로 등반을 못한 유진이가 마중을 나와 고생했다며 쓰윽 안아준다.
짜식. 괜히 뭉클하다.
인배가 건네주는 커피가 마시지 않아도 따뜻하다.
등반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늦기 전에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가자며 서둘러 차에 타라는 진희와 희정언니도 고맙다.
등반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은 여기에 남긴다.
맛난 고기에 뒤풀이가 이어지고 숙소로 돌아가 약간의 수다를 떨고 다음날.
순두부 한 그릇을 해치우고 매바위로 출발.
무릎이 시원찮다는 핑계로 오늘은 구경만 하기로.
황소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 사람들이 오르는 모습을 쳐다본다.
의현 형님과 유진이와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순간도 참 좋았다.
이어지는 장안동 뒤풀이 장소에서 등반 총평을 들으며 1차 동계캠프를 마무리한다.
안전이 제일이라며 너무 좋았다는 의현 형님의 지당하신 말씀이 이어지고
산에서는 바지런하라는 진석형님의 오랜 지론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꼭 기록해야지 했는데 이제야 남기는 나의 이 게으름.
'바르게 부지런하라'
'등반할 때 내가 편하면 두 사람이 힘들어진다'
'설치할까 말까 망설여지면 무조건 줄을 깔아라'
어딘가 소속되어 뭔가를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던 이날 게스트였던 정쌤의 등반 후기가 이번 훈련의 분위기를 말해주리라.
왜 산악회를 드는지 알 것 같다고.
어떻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짜증 내는 분들이 한 명이 없냐고.
제삼자의 시선으로 마주한 산악회에 대한 평가를 들으며 우리가 어떤 산악회인가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얼마나 바지런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는 등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