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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ungmi May 22. 2024

나자렛의 빅터

빅터 엄마의 눈물

아이들은 캐나다에 금방 적응해
어른들이 문제지


캐나다에 오기  많이 들었던 말이었고, 나역시도 그럴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캐나다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옥빌의 한인 모임에 나가면서 알게되었다.


1년이 지나도록 삼삼오오 도시락을 먹는 그룹지 못해 엄마가 고심끝에 준비한 작은 주먹밥 여러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걸어다니며 점심을 해결하는 고등학생

캐나다가 너무 좋은 오빠와는 정반대로 매일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울쌍인 어느 집의 둘째아이

그리고 온통 현지인들이 가득한 작은 카톨릭 학교에서 외톨이가 되었던 우리집 첫째아이까지


그런데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일까,

외톨이었던 첫째 아이에게 가뭄에 단비같은 친구가 찾아왔다.


9월 학기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온것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서 이민을 왔다고했다. 현지인들 틈에서 영어가 서툴러 유난히 힘들어했던 첫째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두 아이가 머지않아 단짝친구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어느 날 학교의 행사에서 빅터와 빅터의 엄마를 만났다. 빅터엄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어느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어봤다. 빅터 엄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잠시 당황했다.


“Nazalet. Hometown of the Jesus Christ”


나자렛.

그 당시에는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시점이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고국이 전쟁을 하고있는 마음이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성경에서 익숙했던 나자렛이라는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신기하기도했다.


첫째 아이와 빅터는 YMCA 축구 수업을 같이 들으며 조금씩 친해졌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올 무렵 빅터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서 가장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알고보니 걸어서 5분 거리에 빅터네 가족이 살고 있어 거리도 아주 가까웠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빅터엄마에게 우리가 몇달 뒤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와 첫째 아이가 친해지기 시작한 무렵이었고, 돌아가기 직전에 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YMCA 축구 수업에서 빅터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리가 몇달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조심스럽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얘기해주었다.

옥빌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얘기를 했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반응처럼 ‘오! 아쉽네, 벌써 돌아가는 거예요? 여기에서 정착할 생각은 없는 거예요?’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빅터 엄마는 나의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적잖히 당황했다.

첫째 아이와 빅터는 우리집에서 한번 함께 놀았을 뿐이었고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사이였다.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던 빅터 엄마의 눈물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그칠줄을 몰랐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Can I have your hug? 라고 얘기하고 팔을 벌려 다가갔다. 그리고 나도 금새 헤어지게되어서 속상하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몇일 동안은 곰곰히 생각해봤다. 빅터 엄마는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냈을까?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하게되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구나'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을거라는 사실때문에 헤어짐의 무게감은 비교할  없을만큼컸다.


게다가 첫째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리웠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빅터는 고국의 친구들을 떠나 캐나다에 정착했고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가 떠나는 것이었다.


몇주가 지나 빅터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그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전쟁으로인해 고국의 가족을 마음껏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캐나다에 있던 다른 지인이 떠나게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우리 가족이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곁에 있던 누군가가 또다시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고.


그리고 얼마뒤에 빅터의 집에서 다시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알고보니 빅터의 엄마는 나자렛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배우였다.

아이들을 위해 고국에서의 모든 커리어를 내려놓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떠나온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기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빅터 엄마의 꿈을 응원했다.


그리고 마지막 등교일에 빅터 엄마로부터 그녀의 기원이담긴 Good bye 대신 See you later 라고 꾹꾹 눌러쓴 엽서를 건네받았다.


언젠가 그 엽서를 손에 들고 아이와 함께 빅터와 빅터 엄마를 다시 만나러 옥빌에 가는 날을 어렴풋이 꿈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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