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독학 재수를 마치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학교는 나름 괜찮은 곳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괜찮은 평판, 적당히 괜찮은 입지. 처음 시작하는 대학생활에는 알게 모르게 설렘이 서려있었다. 두근거림도 잠시,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대학교는 물론 나라 자체가 마비되어 버렸다. 그렇다, 나는 20학번이다. 입학식도, 수업도, 시험도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도망치듯 군입대를 선택했다.
21개월만 버티면 내가 사회로 돌아올 때 즈음에는 어떻게든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2년 만에 돌아온 캠퍼스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직 남아있긴 했지만 다들 밖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코로나 초기의 경직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삼삼오오 어울려 다니는 학우들을 보자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물론 내 자리는 없었다. 당시 나의 대학교 인맥은 1학년 때 기숙사에서 친해진 룸메이트와 그 룸메이트의 친구 이렇게 단 두 명이 끝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과생활을 해볼까?', '근데 내가 어떻게?'이미 나 빼고는 서로 다 친해져 있을 것 같았다.그 틈바구니에 끼어들 만큼 나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객관적인 내 입지는 "23살 아싸 복학생". 과생활 하기에 적합한 조건은 아니었다. 시작할 거면 애매하게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닌 서로 아예 모르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곳이어야 했다. 대체 그런 곳이 어디일까. 한참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우연찮게 날 사로잡은 건 동아리 모집공고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관심사로 묶인 조직. 동아리라면 눈치 안 보고 녹아들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 학교에는 동아리가 참 다양했다. 종목별로 없는 게 없었다. 수영, 농구, 테니스 같은 운동부터 시작해서 농사, 코딩, 드론, 심지어는 디제잉까지. 100개나 되는 동아리 중에서 토론동아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해왔던 활동이었다.굳이 고른다면 토론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홍보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문의를 드렸다. 가입 전에 간단하게 면접을 봐야 한다고 했다. 말하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내가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가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한참을 희죽거리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한 마디 했다. "너 떨어지겠는데?".
그당시 자취를 시작한 나를 축하하기 위해 고등학교 동창 두 명이 내 방에 놀러 와있었다.면접 시간이 다 되어 나갈 채비를 하는 나를 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진짜 그러고 갈 거임?" 친구들은 심각하게 물었다. 뭐가 문제지 싶어서 찬찬히 거울을 살펴보았다. 다 늘어나서 허름한 피켓 티셔츠, 무릎뼈가 불거지도록 딱 달라붙는 청바지, 땀으로 떡져버린 앞머리까지. 내 몰골을 보고는 나도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약 10분간 나를 홈리스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만들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졌고 간신히 사람으로는 보일 수준에 도달하자 친구들은 외출을 허락했다.
모든 게 생경하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2년 만에 처음 밟아보는 캠퍼스, 전투복을 벗고 처음 입어보는 일상복, 처음으로 만나는 대학교 사람까지. 그래서였을까? 길을 헤매는 바람에 면접 시간 5분을 남기고 겨우겨우 면접장소에 도착했다. 면접을 보기로한 동아리방의 문틈 사이로 미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컥 들어가기가 쑥스러워 잠시 화장실로 들어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8월 말의 바깥날씨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멋을 부려보겠다고 윗옷을 바지 안으로 넣어 입은 탓에 등에서는 구슬땀이 줄줄 흘렀다. 찬물로 손을 씻고 세수를 하니 어느덧 들어갈 시간이 되어있었다.
복학 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학교 사람.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제야 밝히는 사실이지만 동아리방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의자에 밀려 여기저기 우그러진 장판, 벽 군데군데 끼어있는 물때, 어지럽게 널브러진 비품과 정체모를 도구들까지. 한 마디로 허름했다. 긴장한 탓에 유감스러운 첫인상은 어느새 잊혔고 면접이 시작되었다. 나름 준비를 해갔다. 뉴스기사도 찾아보고, 가입을 결심한 계기나 토론에 대한 나의 생각 같은 것도 정리해 뒀었다. 이런 것들은 도통 쓸모가 없었다. 토론동아리 면접이지만 목적은실력검증이 아니었다. 뭐랄까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떨어트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상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정도. 단순한 문진에 가까운 가입절차였다.
대략적인 신상파악이 끝나고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자 면접을 담당한 회장님이 운을 떼셨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없으세요?" 솔직히 말하자면 술 많이 먹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알쓰, 이른바 알콜쓰레기였기 때문이다. 술 먹기가 너무너무 싫었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도 술을 못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궁금한지와 별개로 면접에서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없는데요." 라며 딱딱하게 끝내자니 너무 정 없어 보였다. 머리를 짜내었다. "그... 저녁에 미트볼을 해먹으려고 하는데요 혹시 다짐육은 어디서 파나요?" 회장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친절하게 슈퍼 위치를 알려주셨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는데 카톡 알람이 울렸다. "토론동아리 oo 공지방입니다 신입부원 ooo님 환영해요!". 합격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면서 동아리 가입이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싶어 김이 새기도 했다. 초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름을 쭉 한 번 훑어봤다. 인원수는 대략 40명. 죄다 모르는 이름뿐이었다. 한참을 아래로 스크롤하던 중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핸드폰을 툭 던져놓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카톡!" 그때 다시 알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