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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Mar 06. 2024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벗어나기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연습

2년 전쯤의 기억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 인생이 지옥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물리적인 폭력이 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언어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사람은 내 상사였다

제법 즐거웠던 회사가 악몽이 되었다. 출근길에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던 것도 주말이면 다음 날이 두려워진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제 제법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신이 위험한 상태가 이런 것임을 처음으로 느꼈다. 나의 밑바닥도 마주했다. 서른이 넘은 내가 하루 종일 울 수 있는 인간임을 깨달았고, 내 몸에서 그렇게 많은 수분이 나올 수 있구나 하고 덤덤히 바라봤다. 당시의 나는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한 사람이었다.


친절한 그 사람과 있으면 묘하게 불편했다

굉장한 능력이 있어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 같았고, 내게 좋은 영향을 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과 있으면 어딘가 마음이 답답했다. 분명히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걸 아는데도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점점 작아졌다. 나에게서 작은 단점을 발견한 후로는 ‘함께 고쳐보자.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라고 응원을 건네다가, 어느 순간 ‘오래 지켜봤는데 너는 내가 도와줄 수준에 한참을 못 미쳐. 어떻게 손쓸 수가 없겠어’로 태도를 돌변했다.      


업무 조언을 하러 따로 나간 자리에서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운 것을 문제 삼았다. 언제부턴가 그 사람과 대화할 때면 눈물이 났다. 억울함과 당혹스러움의 눈물이었다. 매번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무언가를 툭 지적했다. 내 말은 전혀 가닿지 않았고 다른 의도로 해석되었다.

그 사람과 있을 때 총 세 번 울었는데, 그걸 하나하나 짚어냈다. “제 앞에서 언제, 언제, 언제 우셨죠? 앞으로 또 울면 같이 일 못 해요.”, “제가 지금까지 한 얘기를 그대로 말해볼래요? 이봐 이봐. 하나도 듣고 있질 않잖아”라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세 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주입했다.


문제는 그 사람의 말을 내가 믿었다는 것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내게 비상식적인 목표를 강요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나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걸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고해야 하는 항목도 계속 추가 됐다. A, B, C, D를 보고하는 게 아니라 A′, A″, A′″로 공유해야 하는 항목은 늘어났고, 당연한 걸 왜 하지 않았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사람이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데 업무 시간의 세 시간 이상을 썼다.

그때까지 일을 꽤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어느덧 나는 ‘일의 기본기가 전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후 심리상담을 하고 알게 된 건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람의 말을 내가 스스로 믿었다’는 거다. 그 사람은 차츰 내 인사에 고개만 끄덕였고, ‘너는 정말 하찮아’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터널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렇게 어두운 터널 안을 한참 헤맨 지 4~5개월쯤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출근을 할 수가 없어 거의 재택근무를 했는데, 저녁을 먹다가 아빠가 왜 눈이 빨간지 물었다. 그 사람에게 전화로 시달리던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생각의 여과 과정 없는 말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팀장이 미친년이라서.”      


그러곤 태연하게 웃으며 밥을 먹었다. 그 순간 내게서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부모님께 내 상황을 들키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힘들게 숨겨왔는데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우리 딸 힘들어서 어떡하냐고 말씀하실 뿐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빗장이 해제된 기분이었다.

내게 벌어진 일들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걸 비로소 객관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더는 나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게 되었을 때 시야가 트이고 확장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사람을 대할 때 톤앤매너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일을 못한다는 건 받아들여도 그 사람이 표현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모습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주도적인 해결이 아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팀을 옮기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이 사건은 여러 방면에서 나에게 큰 변곡점이 되었다. 가끔 이때의 일을 떠올려보면 멈추었던 일상이 다시금 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홀로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

당시 더욱 힘들었던 건 이 이야기를 아무하고도 공유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다른 팀 동료가 퇴사를 앞두고 마지막 인사로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분은 마음도 여리고 참 좋은 사람이라서 네가 안심된다”라고. 그때의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지옥의 시간을 걷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동료에게 희미하게 웃어줬다.

친한 동료들은 여전히 그 사람을 ‘좋은 상사’로 기억한다. 처음엔 이 사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모든 건 상대적이라는 걸, 나에게는 악인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이 일을 계기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타깃은 왜 하필 나였을까?

상황이 종료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정이 더 이상 휘몰아치지 않을 거 같을 때, 유튜브에 ‘나르시시스트’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해 꽤 많은 영상이 나왔고 그중에 김경일 심리학자님의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이 유형의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먹잇감은 “능력 있고 착하고 성실한데, 정작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기막히게 알아본다”고 했다. 특히 “스스로에게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딱 내 얘기였다. 그 말을 듣는데 내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결국 나를 망치고 있던 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었다는 걸 극명하게 깨달았다.      


또 이 유형의 사람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상대방을 낮춘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나와 동료들이 연차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서 자신이 끌어올려주겠다고 계속 강조했는데,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돋보여지기 위해서였다. 그제야 모든 비밀이 풀렸다.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한다

팀을 옮긴 후 지금의 팀장님을 만났을 때 일하는 과정마다 확인받고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동일하게 했는데, 그 사람이 단점으로 판단했던 모든 걸 이분은 장점으로 생각해주셨다. 연말 회고 미팅에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연차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연차에 비해 능력이 모자라...” 혹은 “연차가 더 많아지면 고치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지금이라도...” 같은 압박의 말만 들었지 연차에 비해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감사했고 마음에 오래 남았다. 덕분에 스스로 의심하지 않고 조금씩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나르시시스트에 관한 책 한 권을 우연히 읽었고 과거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나르시시스트에게 당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당하지 않아요. 엄청난 정의감과 지식과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고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자만이 그들의 표적이 됩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이 나보다 지적 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리고 그들이 사랑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는 줄 아세요? 정의롭고 진실한 마음으로 똑똑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될 겁니다.

나이가 많든 어리든 어느 곳에 살든 성별이나 인종 종교와 상관없이, 학벌이 어떻게 되든 직위가 어떻게 되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장애가 있든 없든,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겠지만, 나르시시스트들의 수준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과 인격을 갖춘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한 사람이 보일 거예요.

여러분은 분명히, 오리가 아닌 백조임을 깨달으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를 마음속으로 한번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 《그 사람은 왜 사과하지 않을까》, 윤서람, 264~266쪽


과거의 나처럼 누군가에게 영혼을 훼손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힘을 주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자.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또 기막히게 우리를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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