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금요일 저녁 9시, 서점을 배회하다 퇴근하려던 길, 카페에 삼삼오오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에 집중해 있는 여성분을 발견했다. 그분이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는 제목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나 역시 그분과 같은 표정으로 그 책에 빠져들어 있었기에.
마치 영화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표지가 싸여진 책, 김민철 작가님의 《무정형의 삶》이었다.
이 책은 작가님이 두 달간 파리에 머물렀던 경험을 쓰신 에세이인데, ‘여행 산문집’이라고만 소개하기엔 어딘지 아쉽다. 이 책에는 작가님의 ‘20년간 회사 생활의 마침표’와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양의 삶을 살고 싶었다. 바람은 간절했지만 다른 모양이 어떤 모양인지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은 자꾸 뾰족해져만 가는데, 현실은 나를 두텁게 가로막고 있었다. 살던 대로 살아서는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명확했다. 다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삶이 필요했다. 지금껏 하지 못한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내 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을 창으로 삼아 두터운 현실을 뚫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20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떠나, 내가 도착한 곳은 20년 넘게 간직한 내 오랜 꿈이었다. –5쪽
2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만큼의 눅진한 감정이 녹아 있기에, 문장을 따라 읽으면 내 마음도 함께 요동쳤다. 특히 프롤로그는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단단한 결정체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그곳을 ‘파리’라 불렀지만, 그 두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내겐 많았다. 일상의 때를 살살 벗겨내자, 시간의 먼지를 슬쩍 털어내자, 파리라는 꿈은 여전히 젊게 펄떡이고 있었다. 덕분에 두 달 동안 파리에서 한 권의 책으로도 압축될 리 없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토록 간단할 리 없다. 나의 여행 가방 안에는 두 달 동안의 짐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의 시간이 함께 담겼으니까. 비행기 티켓에 적힌 ‘파리’라는 지명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내 꿈의 이름이었으니까. 나는 회사원이 아니라 마침내 자유인의 신분으로 그곳에 도착했으니까. -5~6쪽
마음을 후비는 빛나는 문장들이 가득해서도 좋았지만, 이 책에서 특히 좋았던 점은 따로 있었다. ‘로망의 공간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너무 행복했습니다’라고만 쓰여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에는 작가님이 파리에 도착해서 설레고 반짝이는 눈빛을 장착하고 있다가, 장기 여행자가 겪는 ‘모든 게 심드렁해져서 그런 자신에게 놀라는 감정’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책 중간중간에는 꿈의 공간에서도 좌절을 느끼는 순간들이 콕콕 박혀 있다.
하루짜리 여행도 지치는 법인데, 두 달간 계속되는 여행이라니. 너무 좋은 것 앞에서도 사람은 소진된다. 지친 몸에는 흥이 깃들지 않는다. 눈은 더 이상 새로운 걸 감각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고, 어딜 가나 심드렁했다. -234쪽
작가님께서는 두 달간의 여행이 끝나면 지난한 현실과 다시 마주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다.
자주 불안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의심할 것이다. 24시간을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기도 할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 겨우 이거였나 고민할 것이다. 파리에서의 내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313쪽
꿈에 그리던 여행을 마친 후, 인생에는 대단한 무언가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갑자기 파리에 어울리는 근사한 나로 변모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42년간 몰랐던 자아를 거기에서 갑자기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 혼자 아무 말 없이 있는 인생의 한 조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인생의 조각이 나의 남은 시간에 어떤 빛을 비춰줄지는 나만 알겠지. 오랜 후에 나만 살짝 알게 되겠지. -17쪽
하지만 비로소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한 여자가 20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두 달 여행을 떠났다.’ 이 문장 뒤에 이어질 문장은 무엇일까? 나는 오래도록 궁금했다. 두 달의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나는, ‘그토록 원하던 무정형의 삶에 도착했다’라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5쪽
여행을 마친 후 작가님께서 ‘무정형’의 상태를 깨달으신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내 삶의 모양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아예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종종 하곤 한다. 종교에 귀의하거나, 해외로 이주하거나, 사업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하고.
그런데 아직은 지금 내 삶의 모양을 크게 바꾸고 싶진 않다. 아침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 줄넘기를 하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우왕좌왕 책을 만들고, 동료들과 즐거운 수다를 떨며, 하루에 서너 장이라도 사진을 찍고, 이렇게 글도 조금씩 쓰는 지금 내 일상의 모양이 단조롭지만 마음에 든다.
운 좋게 영화관에서 열린 작가님의 북토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날 이야기 중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님께서는 무언가를 새로 배울 때면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떠신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계속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작은 불씨에도 화들짝 놀라야만 한다.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을 잔뜩 불어넣어 그 불씨를 키워야만 한다. 어른의 공부가 그렇다. 특히나 시험이 목적이 아니고, 어떤 필요가 목적이 아닐 경우에는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희미해지기 십상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처음엔 원동력이 되어주지만, 그것이 성실성까지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이걸 해서 뭐 하나’라는 마음이 들불처럼 커져서 결국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다 태워버린다. (…) 그러니 나는 고작 문장 하나에 그토록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흥분하며 나의 기를 돋울 수밖에 없었다. -149~150쪽
작가님께서는 하루 10분, 출근길에 어플로 프랑스어를 배우신다고 했다. 그렇게 500일을 하셨고 한 글자씩 천천히 원하는 바를 현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으셨다.
나도 작가님을 따라서 영어, 일본어를 하루 10분씩 어플로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짧은 공부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이 책을 읽고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됐다. 뭐든 꾸준히 하면 결국 나아진다는 것을, 어쩌면 기적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님께서는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꼬박 10년이 되었을 때 에디터분이 책을 내자고 찾아오셨다고 한다.
‘뭐든 꾸준히, 열심히, 즐겁게 하기.’ 이 책 덕분에 다시 마음 깊이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