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ndys Jun 19. 2020

나의 일주일 비건 도전기


오랜만에 접속한 서점 사이트에서 무미건조하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눈길을 끈다. 순전히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서점의 마케팅에 기꺼이 유혹당했고 바로 책을 사고야 말았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에 대한 이야기다.


영혜는 어느 날 생고기와 피가 뚝뚝 흐르는 꿈을 꾼 이후부터 고기를 먹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점점 야위어 가는 영혜를 걱정하고 가족은 영혜에게 억지로라도 고기를 먹이려고 하는 상황. 끝끝내 영혜는 고기를 거부하고 갈등은 고조되는 서사가 담긴 책이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흥미로운 스토리에 책장을 빠르게 넘겼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마음이 무거워졌다. 영혜가 동물들의 환청을 듣는 장면에서는 왠지 동물들이 울부짖는 환청이 나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아 책을 몇 번이고 덮어야만 했다. 꾸역꾸역 책을 다 읽어 내던 날.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했다.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책을 읽은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선언했다. 자신은 '비건'이 되었노라고. 더 이상 자발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게 느껴졌다. 동물원을 탈출했다가 사살된 퓨마 '초롱이' 사건을 보며 동물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모임에서 늘 웃긴 캐릭터를 담당하던 그는 그날만큼은 사뭇 비장해 보였다. 그러면서 회사에는 아직 비건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 회사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기도 한다는 고충을 토로했다. 그와 더 이상 치맥 타임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아쉬움이 스쳤지만 응원의 말을 보탰다. 나도 돼지고기를 먹으면 항상 배탈이 나서 돼지고기를 안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고, 회사에서는 샐러드 열풍이 불어서 나도 종종 그 열풍에 동참하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채식주의에 최적화된 나의 신체 조건과 회사 분위기를 부러워했다.


신기하게도 주변에 한 명의 채식주의자가 생겼을 뿐인데, 그 이후로 채식주의에 대한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채식을 선언하기 딱 1년 전에도 만났던 다른 친구가 자신은 채식주의를 지향한다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튼 그 이후로 주변에 채식을 지향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친구 소개로 알게 된 A는 <그린피스>라는 환경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한다고 했다. 그는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같이 볼 때도 있고 환경 문제에 대해 공부할 때도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 단체에서는 채식주의자가 많았고, A도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환경과 채식, 둘 중에 한 가지만 신경 쓰기에도 버거운 나로서는 동갑내기 A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한 번은 꾸준히 하고 있는 글 쓰는 모임에 갔을 때다. 총 4명이 정원인 모임에서 2명이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고기를 서서히 줄여 가려한다고. 나머지 한 명은 이미 채식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3명의 비건과 1명의 논비건이 있는 셈이었다. 두 명은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이란 책을 읽고 나서 실천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직은 그 책을 읽을 용기가, 선뜻 채식에 도전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고기를 이토록 좋아하는 내가, 채식주의자라니. 너무 거창해 보이는 동시에 자신이 없었다. 고기를 멀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를 유별난 사람으로 보진 않을까?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적었지만, 되지 않을 변명 거리는 잘도 찾는 나였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했던가. 아주 사소한 계기가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린피스>의 환경에 관한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어떤 영상을 보기 위해 광고로 등장했던 그 영상은 15초 내에 나를 사로잡아 10분이 넘는 영상을 보게 만들었다. 영상 속의 환경 전문가는 지구온난화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 일회용품을 줄이는 것보다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호소했다. 영상 시청을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 요일 비건을 당장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매일 같이 채식은 못하더라도 일주일 중 하루 고기 소비를 줄이고, 우유도 안 마시고, 동물성 식품을 아예 안 먹는 게 환경에 조금이라도 도움된다면야, 이 정도도 못하리. 이 참에 곧잘 더부룩 해지곤 했던 내 장 건강도 챙길 수 있으니까 그 날로 바로 요일 비건을 실천해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요일 비건을 실천해 가고 있던 와중, 며칠 전 함께 일 하는 동료이자 사이드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있는 J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재밌는 게 생각났다고 했다. 제안은 즉슨 사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일주일은 채식을, 일주일은 노 플라스틱(No Plastic)을 직접 실천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영상이나 글 같은 기록으로 남겨 보자는 꽤나 구체적인 제안이었다. 채식의 단계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정도는 주기로 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요일 비건을 실천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을 통으로 실천해보자는 J의 제안에 '히익, 일주일이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방법은 몰랐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대책 없는 마음으로.


3월 1일. J가 제안한 대망의 비건 실천 프로젝트의 첫날이었다. 다행히 그 날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은 모두 채식 주의자 친구들이라서 점심 메뉴 선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채식한 끼"라는 어플 사용자가 아니던가. 자연스럽게 어플을 켜 식당을 골랐다. 그러나 일요일이라 그런지 채식 메뉴를 지원하는 식당 중 영업을 하는 곳이 몇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찾은 샌드위치 전문점 서브웨이에서는 비건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빼곡하게 가득 찬 메뉴판에서 비건 메뉴는 단 하나뿐이라니. 그 선택받은 메뉴는 "베지 샌드위치"였다. 평소의 나라면 거들 떠도 안 봤을 메뉴였을 텐데.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기 위해 메뉴판을 눈으로 바쁘게 훑던 그 순간, 생각했다. 채식 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선택지 없는 삶이란 말인가. 어떤 동물도 희생되지 않는 식단을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 하단 말인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 향했던 카페에서, 평소 단골 주문 메뉴인 카페 라테가 아닌 소이 라테를 처음으로 주문해 보았다. 알고 있던 일반적인 라테 맛과는 달랐지만, 이것은 일주일 동안 받아들여야 하는 맛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3월 2일, 비건 도전 2일 차다. 우유와 계란까지 안 먹으려니 정말 먹을 게 없는 것 같았다. 환경과 나에게 조금 양보해서 우유와 계란까지는 먹는 '락토 오보 비건'에 도전하기로 했다. 사정을 알리 없는 엄마로부터 "만두 먹을래?", "참치 김치찌개 먹을래?", "떡갈비 먹을래?" 같은 유혹이 쏟아졌지만, 결국은 감자튀김과 김치 부침개로 간단하게 배를 채웠다. 일주일 동안의 도전. 나는 일주일 동안 무엇을 얻게 될까. 일주일만이라도 락토 오보 비건을 잘 지킬 수 있을까? 환경을, 동물을, 이 프로젝트를 말이다. 부디 내가 지키려는 것들을 잘 지켜낼 수 있기를 바라보며, 내일은 동료 비건인이 추천해준 동물 복지 관련 다큐멘터리를 한 편 봐 볼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불편러는 새벽 배송이 불편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