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익숙한 흔적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기시감이 훅 밀려오는 순간. 라앵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가 그랬다. 허공 위에 오선지처럼 뒤엉킨 전깃줄, 비슷한 색감으로 이어지는 대문들.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나의 시간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민을 안고 하염없이 걸었던 그 시간들이 묻어 있었다.
어릴 적 자동차를 타고 종종 주택가를 지나곤 했다. 그럴 때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골목길 풍경은 늘 눈길을 끌었다. 낮에는 햇빛이 입구 언저리에서 비스듬하게 쏟아져 내리고 밤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허공에서 바스러지는 곳. 바깥에서 훔쳐보는 안쪽의 풍경은 아무에게도 읽힌 적 없는 이야기처럼 비밀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세상에는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골목길은 내게서 잊혀가는 듯 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어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껍데기 속 내가 늦되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껍데기에 맞추어 자라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모르고 방향도 몰랐다. 뒤늦은 고민은 불안을 몰고 와 예상치 못한 감기처럼 나를 괴롭혔다. 마치 텅 빈 우주 한복판을 홀로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들려오는 거라곤 끝없는 침묵뿐. 아무도 내가 거기에서 앓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골목길이 나를 찾아온 건 바로 그 때였다.
다시 마주친 골목길은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잠시 머무르다 가라고 곁을 내어주는데도 모두들 금세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까. 미세하게 금이 간 담장, 고개 꺾인 자전거, 녹슨 방범창처럼 곳곳에서 외로움의 냄새가 났다. 그 이유 모를 쓸쓸함이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걸었다. 때로는 나지막한 음악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때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슬렁슬렁. 골목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게 꼭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로 같았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 순간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에게 말을 걸어볼 수도 있을 만큼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처음이었다. 내가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도.
당장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바깥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나온 길이 없어 앞으로의 방향을 몰랐던 내게 골목길은 뒤돌아볼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골목길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우주에서 위태롭게 떠다니는 대신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라앵의 그림을 들여다본다. 어릴 적 나를 사로잡았던 골목길처럼 어딘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풍경들. 빛바랜 지붕을 타고 문장들이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누구나 저마다의 골목길을 하나씩 품고 있겠지. 그렇다면 저 문장들은 지금껏 이곳을 지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문득 궁금해진다, 골목길 한 쪽을 채우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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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그림 한 잔> 세 번째 잔은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라앵 작가와 함께 마셔볼까 해요.
이 글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