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사의 영화를 봄니다.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by 앤 브래드 스트릿
봄의 제전
춘사(春史)는 봄의 역사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봄에 어울리는 영화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개최되는 영화 시상식이었고, 그 해의 시작을 계획하는 기준점 역할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춘사를 봄에 만나는 일은 힘들어졌다. 아쉬운 일이지만, 멈추지 않고 시상식을 지속해 온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이년 후 춘사국제영화제 30주년은 꼭 봄에 보고 싶다.
앰배서더를 봄니다.
영화제의 앰배서더는 살아 움직이는 상징 같은 존재다. 춘사의 총감독을 맡고 가장 처음 신경 쓴 일은 영화제의 새로운 컨셉에 어울리는 홍보대사를 선임하는 일이었다. 집행부와의 논의를 거쳐 춘사의 새로운 방향성은 '신구(新舊)의 조화'로 결정되었다. 영화에는 높낮이가 없고, 좌우가 없으며, 갈등보다 조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어울리는 홍보대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많은 배우, 감독들을 만나 제안을 드렸지만 일정과 상황 등이 맞지 않아 선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조달환 배우의 추천으로 이순재 배우님과 연락이 닿았다. 선생님께서는 단번에 홍보대사직을 수락하셨고, 이후 신구의 조화에 어울리는 배우 3분이 합류했다. 큰 매듭이 풀리자, 모든 것이 풀리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앰배서더가 없었다면 춘사의 역사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유진 배우와 양동근 배우가 홍보대사에 합류했고, 마지막으로 함은정 배우도 참여하면서 춘사영화제의 앰배서더가 완성되었다. 네 분을 모시고 위촉식을 가졌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25회 춘사영화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앰배서더가 위촉되고, 언론에 보도자료가 전송되자 기자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다. 새로움은 언제나 지나온 것의 도움으로 도약한다.
이순재 배우님은 언제나 열정적이셨다. 늘 시상식에 가장 먼저 도착하셔서 다른 배우들을 챙기셨다. 소유진 배우와 함은정 배우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영화제의 홍보에 앞장섰다. 정말 큰 도움이었다. 그리고 양동근 배우는 몸소 축하공연을 자원했다. 그가 부른 <골목길>은 당시 춘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최고의 무대였다. 네 분 모두 27회 행사까지 동행하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사회자를 봄니다.
영화제의 사회자는 흐름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생중계로 진행되는 시상식에서 사회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특히 시간을 예측할 수 없는 수상소감은 사회자 없이는 조율하기 힘들다. 시상식의 사회자 선정은 심사위원을 선임하는 것만큼 관심을 모은다. 25회 춘사는 사회자 없이 진행됐다. 최초의 비대면 행사를 활용해서 영화인과 관객을 사회자 없이 연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시상식은 사회자 없이 성우의 안내로만 진행되었다. 행사 이후 실무진과의 리뷰를 거쳐, 26회 시상식은 단독 사회자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시상식의 사회자는 누구보다 영화를 잘 알면서, 후보자와 수상자를 비춰줄 수 있는 역할이어야 한다. 그렇게 팝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김태훈이 낙점됐다.
김태훈 평론가의 진행은 매끄러웠다. 행사가 끝난 후 참석한 많은 영화감독들이 역대 춘사영화제의 사회자 중 최고라고 엄지 손가락을 세울 정도였다. 김태훈 평론가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오랜 시간 라디오 DJ를 경험한 진행의 달인이다. 또한 팝 칼럼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고 늘 분석적인 시선으로 영화와 문화를 관찰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늘 공부하는 사람이다. 참 고마운 인연이다.
27회 춘사는 관객과 대면하는 시상식으로 개최됐다. 단독 사회자보다는 더블 MC가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유명한 배우를 쓰는 것도 좋지만, 우선 2022년의 컨셉인 "Move Again"에 어울리는 선택을 고민했다. 기회를 주는 시상식은 어떨까? 그렇게 신인 배우 김예은, 지은호가 사회자로 낙점됐다. 김예은 배우는 최근 <닥터 차정숙>의 문채윤 역할로 크게 주목받았다.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집행위원장을 봄니다.
영화제를 회사라고 보면, 집행위원장은 대표이사다. 6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의 이사장을 역임한 양윤호 감독은 춘사국제영화제의 수장(首長)이었다. 그는 영화 <가변차선>으로 데뷔한 후, 장편영화 데뷔작 <유리>로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었다. 이후 <리베라메>, <바람의 파이터> 등을 연출했고, <아이리스>를 통해 드라마로 영역을 확장했다.
양윤호 감독은 현역 감독이자, 영화 행정가로 활약 중이다. 얼마 전부터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영화계의 많은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춘사가 내게 보여준 양윤호는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수로, 행정가로 또 감독으로 많은 선후배의 신임을 받으며 오늘도 한국 영화의 새로운 백 년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헌신 중이다. 그는 춘사의 총사령관이었다.
당신을 봄니다.
어떤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영화제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존재한다.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춘사라는 이름은 지금도 존재할 수 있다. 시상식은 화려하다. 레드카펫의 패션도 화려하고, 수상자의 수상소감도 화려하며, 영상과 축하공연도 분명 화려하다. 그리고 내겐 하루의 시상식을 위해 일 년 동안 노력한 스태프들의 땀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하다.
영화제를 옷에 비유하자면 상을 받는 영화인은 단추고, 트로피는 실이다. 그리고 실과 단추를 연결하는 바늘의 역할이 바로 스태프다. 바늘은 실이 지나가는 길을 만든다. 그 길을 따라 단추가 달린다. 바늘은 실과 단추를 연결하고 나면 잊히는 운명이다. 하지만 또 다른 옷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바늘은 녹이 슬 시간이 없다. 내일은 내일의 단추가 또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춘사국제영화제 총감독 김우정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상우 사무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넉넉지 않은 협회의 살림을 책임지신 총장님의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그 어느 영화 시상식보다 공정하고 비전 있는 심사였다고 생각합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성심으로 영화제와 함께한 파트너 여러분, 당신들이 계셨기에 좋은 무대와 트로피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기획을 담당한 기획팀과 프로듀서, 홍보를 담당해 준 PR 매니저, 연출을 담당해 준 연출 감독님, 무대 감독님, 그리고 스태프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코로나라는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은혜 잊지 않고 끝까지 갚겠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 영화 없는 시상식은 없고, 영화제는 영화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국영화 많이 봐주시고, 좋아하는 영화가 상을 받는 시상식도 조금 더 사랑해 주세요.
춘사는 이제 스물여덟이 되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이뤄야 할 일이 많습니다. 가끔 실수할 수 있고, 여러모로 부족한 점 많은 것도 잘 압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겐 봄이였고, 앞으로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멋진 추억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