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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Apr 07. 2023

비루하게 빛나던 반지하 청춘.

2006년 스물아홉, 솔직히 털어놓자면, 당시 음악활동은 삶에 방해였다.

 스물아홉이던 2006년, 솔직히 털어놓자면 당시 음악 활동은 삶에 방해 요소였다. 집을 나서 대학 정문을 지나 교내 방송실로 들어서는 내내 연신 하품이 나서 눈이 벌겠다. 전날 같은 소속사 밴드의 공연을 여자친구와 보고, 밤늦게까지 멤버들과 망원동 지하 합주실에서 연습을 한 터라 기타를 쳤던 손가락 끝에 작은 물집이 잡혀 노랗게 올라왔고, 쉰 목은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거렸다. 인디밴드 활동과는 별개로 대학 신문방송학과 간사로 일한 지 세 달째, 오늘은 교수에게 사표를 내고야 말 테다.


 눅눅하고 먼지 자욱한 주차장 옆 반지하에 웅크려 지내며 카드값을 다른 카드로 막는 너절한 나날의 연속이다. 영화 <기생충(봉준호 감독)>에서 역류를 막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높이 위치한 화장실이나 방에서 행인들의 발만 보이는 창문 구도가 내게는 일상이었다. 여름에는 트렁크 속옷만 입고 종일 선풍기를 틀어도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릴 정도로 후텁지근했고, 겨울이면 덧입은 낡은 내의와 군용 깔깔이에 담요까지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 곡 작업을 하거나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차갑게 굳은 손으로 기타를 쳤다.

 어둡고 습한 반지하 방에서 지질하게 지냈지만, 밖에서는 나름 유명세를 겪고 있었다. 작년(2005년) 불가능할 줄로만 알았던 데뷔 앨범을 발매한 후 인디씬에서 꽤 괜찮은 신인 밴드로 평가받았고, 여기저기 공연과 섭외, 인터뷰 제의가 이어졌다. 연말에는 막연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던 드라마 음악감독까지 경험하면서 팍팍한 삶도 조금은 나아지길 기대했다. 차비가 아까워 먼 거리를 걷거나, 학내식당의 값싼 식비도 아까워 아침 일찍 투박하게 도시락을 싸서 다니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인디뮤지션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상외로 많이 팔렸다는 앨범 수익은 (몇 년 후 소속사를 나올 때까지)단 한 번도 정산받지 못했고, 공연을 해도 무보수거나 돈 대신 담배로 받거나 뒤풀이 후 멤버들과 차비를 나누는 정도 소액에 불과했으며, 유명 영화지나 음악 잡지사들과 인터뷰를 한다고 별도의 비용을 받던 시절도 아니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한 때였지만 합주실 대여료가 아까워 공연 전 두어 번 맞춰볼 수 있을 뿐이었다. 술•담배는커녕 프로필 촬영용 옷 한 벌 사는 것도 과소비다 싶어 손을 떨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크고 볼품없는 잿빛 솜털 점퍼를 겨우내 입고 기타를 둘러메고 홍대와 망원동 일대를 좀비처럼 걸어 다녔다. 텅 빈 지갑만큼이나 삶의 밀도는 엷고 얕았고, 앞은 흐릿했다. 


 "박 선생, 요즘 가장 바쁜 때인 거 알잖아요, 나 이거 참."


 잘 안다. 여름방학인 8월은 가장 한가로운 때다. 평소 이름을 부르거나, 박 조교라 부르던 교수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의심 많은 교수였지만 그간 원치 않는 신임을 받은 덕에 과중한 업무로 음악 활동에 지장을 받아왔다. 여기에서 일하기 전 한 방송제작사로부터 매주 한 꼭지를 맡아 연출해 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인디밴드 활동이 중요했기에 포기했었다. 대학에서의 여유로운 업무시간을 기대하고 계약했는데 더 이상 창작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대학 간사로 일한 기간은 100일 남짓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일을 그만두고 음악 활동에만 전념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구직은 진행형이었다. 후임 간사를 구하고 인수인계할 수 있도록 사직서를 내고 2주를 더 다니면서 이삼일에 한 번꼴로 구직 지원서를 내거나 면접을 봤다. 그러면서 퇴근하고 들어온 밤이면 새 앨범에 넣을 곡 작업을 병행했다.


"방구석 인디 뮤지션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 계획도 없었다. 할 만한 일이면 가리지 않고 연락했고 지원서를 작성해 보냈다. 아예 컴퓨터 첫 화면을 구직사이트로 해놓고 일거리를 체크했다. 음향업체에서 서류 업무를 맡기도 했고,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음원과 뮤직비디오, 에로영화 등을 변환해 서비스하는 일도 했다. 인터넷 사설 교육방송국에서 강의를 연출했고, 동시에 연휴인 명절 대목 기간 동안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 돈을 벌다가 드라마 음악이나 앨범 작업, 공연 일정 등으로 바빠지면 일을 그만두고 음악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빚이 턱까지 차오르면 다시 일을 구해 연명하길 반복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당시 음악 활동은 미래도 불투명하고 현실도 비루하게 만드는 우울한 취미였다.


 ‘조그만 공간, 작은 방에서 일기에 적은 내면 같은 내 이야기를 노래할 테니, 함께 듣고 공감할 당신 언제든 들어오세요, 내 작은방으로.’ 

 데뷔 앨범명인 <작은 방, 다이어리.>의 의미는 이와 같았지만 ‘작은 방’은 내가 살던 마포구 망원동 반지하에 있던 작은방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주방과의 분리를 위해 미닫이 유리문이 달렸을 뿐인 그 좁은 방은 방이라기보다는 거실 한 편에 칸막이가 달린 구석 공간이었다. 그럴듯한 오디오 인터페이스나 믹서기 하나 없이 3.5mm 이어폰 잭 사이즈의 마이크 연결부 달랑 하나 있는 컴퓨터로 앨범의 전곡을 만들고 녹음했다. 중고 부품을 사서 조립한 컴퓨터는 먹통이 되거나 녹음된 음원을 날려 먹기 일쑤였다. 윗집에서 밥을 먹거나 설거지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하면 녹음을 멈추고 기다려야 했고, 반지하 창밖으로 누군가 주차하면 잡음이 들어가 다시 연주하거나 노래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그런 소음이 삶의 일부였기에 그러려니 했고, 화가 나거나 번거롭지도 않았다. 초기 티어라이너 특유의 저질 로우파이 사운드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이렇듯 열악했던 환경과 장비 탓이었다.


 20대 내내 먹고살기와 앞날에 대한 걱정은 거머리처럼 등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구직은 일상이었고, 그 대척점에서 벌이가 되지 않는 음악은 열정이었다. 삶의 무게도, 음악에 대한 열정도 지독하게 크고 무거웠기에 웬만해서는 균형을 잡기 힘들었고, 시소처럼 한쪽으로, 다시 반대 편으로 쿵쿵 바닥을 찧었다. 빚은 멀어졌다가도 어느새 얼굴 앞까지 들이닥쳐 한 치 앞 미래도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가렸다. 뮤지션이랍시고 거창한 비전을 담은 인터뷰를 하고 공연장에서 멋있는 척 기타를 튕기며 노래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의 다리만 보이는 반지하 작은방에서 색 바랜 속옷만 입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알바 신세. 물 위에서 우아해 보이지만 물아래로는 앙상한 다리를 경망스레 휘젓는 백조와 비교하기에도 민망한 반지하 청춘이었다. 지금이야 떠오르는 망리단길이 되어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는 동네가 되어버렸지만, 빗물펌프장이 생기기 전까지 큰비가 내리면 홍수로 악명 높았던 망원동은 내가 지내는 동안 저렴한 월세 덕에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집단 주거지로 기능했다.

 '상습 침수구역으로 서울의 가장 낮은 지대였던 망원동에서도 더 내려간 반지하의 작은방은 내 밑바닥 삶의 소중했던 작은 공간이자 뮤지션으로서의 싹을 틔운 비옥한 토양이었다!' 같은 추억 미화담으로 끝맺기에는 현실은 여전히 비루하고, 지질함은 현재 진행형이라. 만들어진 성공담은 위인전이나 TV로나 접하고, 나는 하루하루 사는 거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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