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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트레바리 <파트너즈> 2021. 11.


극단적 아나키스트 관점에서 얘기한다면,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학습된 모든 다정함과 혐오와 생존을 위한 집단이기주의는 궁극적으로 타 집단과 종이 다른 타 생명체, 그리고 지구 환경에 큰 해악을 끼친다.


2019년 초, 사스나 메르스처럼 잠깐 한 고비만 넘기면 코로나 역시 물러갈 줄 알았던 그 시기. 모든 인간이 잠시 멈췄을 때, 공장이 모두 가동을 멈추고 대기 오염을 최소화했을 때 나타났던 놀라운 변화들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어쩌면 지구 입장에선 인간이 바로 코로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목숨이, 그리고 인간의 삶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어떤 가치보다 우선 시 될 때,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사형 제도를 맹렬하게 찬성하는 사람으로서,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람과 지구와 주변 생명체들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떠올려보면 치가 떨린다. (심지어 내란 학살 주범 전두환 조차 죽음으로 마치 모든 채무가 변제된 것 마냥, 죽음 앞에 고인을 모독하지 말란 식으로 살인귀의 명복까지 빌어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닌가)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면,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지상 과제라면 그 목표를 추구하는 집단은 필연적으로 타 집단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이미 잘 밝혀둔 이치를 조금만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의외로 단순한 진리다.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혹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 아는 사고 방식, 개인주의적 관점 따위로 이해하는 분들은 물론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족을 달면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것은 가장 가까운 단어로 치환하면 '본능적' 혹은 '생존적'이라는 의미다)


반면, 목숨조차 바쳐가며 비非본능적(또는 반反생존적) 행동을 하는 유전자들은 당연히 살아남기 어렵다. 통상 '이타적'이라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인간에게 정말 순수한 의미로 타인을 위하는 행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비본능적 행동은 대체로 나보다 타인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뭉뚱그려서 '이타적 행동을 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것일 뿐.


여기서 질문. '공장식 축산'이 지구 환경에 큰 해악을 끼칠 뿐만 아니라 동물 복지 측면에서 거의 최악에 가깝기 때문에, 그 실태 혹은 참상을 목도한 후 비건을 지향하게 되는 사람도 종종 있는데 만약 내가 속한 무리(집단)가 공장식 축산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가축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한 거 아냐?' 라든가, '합리적이고 경제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갖고 와. 비난만 하지 말고' 따위의 태도로 일관해도 삶에 아무 지장이 없다. 한 쪽으론 살벌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다른 한 쪽으론 여전히 다정함을 발휘해 나의 집단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면 그만이니까.


대전제를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내가 너가 우리가 인간이 살아남는 게 정말로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인가? 내가 살아남고 내가 속한 집단과 조직과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다정함이 아니라 설혹 내 생존에 불리하고 내 집단과 조직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하더라도 감수하고 베풀어야 할 다정함은 없는 것일까.


니체의 위버멘쉬를 내 식으로 풀면, '본능을 거스르는 인간'이다. 본능(=이기적 유전자)과 싸워 이기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지도 모르고 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배척되거나 따돌림 당할지도 모르고, 심한 경우엔 다른 개체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쉽게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맹목적 삶과 생존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뜻 깊은 도태와 죽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면, 아니 그들이 조금 더 오래 살아남다가 그들의 DNA가 기존의 이기적 유전자와 이종교배되거나 혹은 이식될 수 있다면 어떨까.


다정함 그 자체보다 무엇을 향한 다정함이었는지 따져보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냐는 질문 못지않게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냐는 물음 또한 편협하고 치졸하다(질보다 양이라는 계산적 마인드가 비치니까). 맹목적인 양보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질을 추구하기 위해, 친구를 몇 명이나 만들었는가 하는 유치한 질문보다 어떤 친구를 어떤 목적을 갖고 사귀었는가에 더 관심 갖는 세상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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