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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Dec 27. 2023

올해도 당연히 티브이 봐야지

독일 사람들의 명절, 티브이와 함께하세요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산더미 같아 보였던 크리스마스 쿠키는 일치감치 다 먹어 치웠고, 그 커다랗던 크리스마스 로스트 역시 하루가 지나자 완벽히 해체되어 우리 가족 몸속에서 열심히 소화 중이다. 남편은 크리스마스 전통을 무지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남편을 알게 된 이후 지난 19년 동안 딱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남편은 똑같은 요리를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돼지고기 로스트, 적양상추 요리, 크뇌델 (밀가루, 빵, 허브로 만든 커다란 경단을 끓는 물에 조리한다)이다. 샐러드나 다른 거 하나 더 추가하자 해도 안된단다. 점심 먹고 요리를 시작해서 7시쯤 먹는다. 먹고 나면 진짜 배에 돌이 들어간 듯 묵직하다. 이 것이 바로 고기의 힘! 하는 듯한 맛이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한 19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은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있다.


점심 먹고 무조건 티브이를 켜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바로바로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Drei Haselnüsse für Aschenbrödel)!


넷플릭스에서 정주행 하는 게 자연스러운 아들을 키우는 엑스세대 남편, 올해는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저기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갸웃갸웃한다. 아니 이 거 무조건 지역 공영방송 채널 하나에서는 나와야 하는데, 오늘은 우리가 놓쳤나? 이 영화는 절대 놓치기가 쉽지 않다. 12월만 되면 나오고 또 나오고 재방송이 또 나온다. 올해는 언제 언제 나왔나 편성표를 찾아보니 24일 날 3번, 25일 날 3번 26일에도 한 번 나왔다. 물론 12월 31일에도 2번 나오고 혹시 깜빡하신 분들을 위해 1월 6일에도 또 나온다. 이 정도면 멱살을 잡고 "이래도 안 볼 거냐"는 독일인들의 친절한 협박이 되겠다. 


이래도 안 보시렵니까? 이 영화 오늘 무조건 나온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통이 중요하여 티브이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대던 우리 집 아저씨도, 세월과 기술과 자본의 공세에 무릎을 꿇고, 넷플릭스를 열었다. 역시 2023년 12월 26일, 독일 넷플릭스 인기 영화 6위에 빛나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분명 티브이에서 나왔을텐데 우리 같은 가족들이 넷플릭스로 봤나 보다. 우리도 보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앉혀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아들아, 어쩌겠냐. 넌 독일 한국 사람이잖냐.  


독일인들, 정말 집요한 데가 있는 민족이다. 아 진짜 신데렐라가 뭐라고. 독일애들아. 크리스마스 영화 많잖아. 다이하드도 있고, 나 홀로 집에,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등. 하지만, 독일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크리스마스 영화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Drei Haselnüsse für Aschenbrödel)! 날씨가 추워지면 독일 티브이 어딘가에서는 영화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원래는 여름에 찍으려고 했는데 여건이 안 돼서 겨울에 촬영했고, 그 결과 영화의 눈 내리는 배경이 크리스마스랑 찰떡이었다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진짜로 특별한 구석이 있긴 하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체코 영화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3년에 나온 공산주의 국가에서 만든 영화가 서독에서 대 히트를 쳤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솔직히 아주 아주 놀랍고 부럽다. 유럽 내 공산주의 국가들은 북한과 같이 고립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서독 아이들은 동독에서 만든 만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개성공단이 처음 건설 되었을 때 뉴스에 나온 지도를 보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니, 개성이 이렇게 서울이랑 가깝다고? 


또한 이 영화 속 신데렐라는 매우 자주적이다. 왕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다. 왕자와 맞먹거나,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냥 등등) 재주꾼이다.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권위에 절대 쫄지 않는다. 숲 한가운데에서 무기를 든 귀족 출신 남자 셋을 만나도, 그들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배짱도 있다. 이 역시 영화가 독일에서 무려 50년이 되도록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가부장 제도가 남아 있던, 냉전의 한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갈등을 뛰어넘어보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던 거 보면, 50년 전 사람들도, 다들 치열하게, 용감하게 살았구나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도 외친다. 어쩔티비? 당연하지! 


후기 : 우리가 영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었다. 간호사인 친구는 크리스마스이지만 근무 중이었다. (돈 더 준다고 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영화 음악소리를 듣고 눈물이 찔끔났다나. 이럴 때 보면 독일 사람들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표지 사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3707-Moritzburg-2016-Aschenbr%C3%B6del_WPK-Br%C3%BCck_%26_Sohn_Kunstverla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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