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그 검은 상자를 저와 함께 열어보시겠어요? 어
2013년은 한방이 있는 해였다. 4월 결혼 -> 9월 출산 -> 12월 백일잔치. 어? 뭐지? 결혼식과 출산일 사이가 지나치게 짧은데? 그렇다! 결혼식 때 남편과 단둘이 입장한 게 아니다. 이미 배 안에 5개월 된 꼬맹이가 있었다. 정말 간절히 원해서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면 모를까, 제 아무리 준비성이 철저하고 기획력이 뛰어난들 1년을 결혼부터 출산, 그리고 백일잔치까지 한방에 연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배 안 꼬맹이의 태명은 ‘한방이’가 되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잘하는 장기를 애먼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데 내겐 임신과 출산이 그랬다. 저 사람은 공부머리를 타고 났네, 저 사람은 운동 신경을 타고 났네 하듯이 나는 자궁을 타고 났고 특화된 임신 체질이었던 것이다. 다만 서른여덟에 알게 되어 통탄을 금할 길 없다. 이런 개인기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인구절벽으로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에 크게 기여하고 다산 정약용보다 더 유명한 다산 천준아, 한국의 국모쯤으로 불리지 않았겠나.
어쨌거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꼽는다면 임신한 열 달을 꼽겠다. 입덧도 없었다. 한밤중에 제철 아닌 과일이 생각나 남편을 시험에 들게 하지도 않았다. 임신 전과 똑같은 식욕에 머리만 대면 자는 습관도 여전했다. 당시 ‘KBS 영화가 좋다’ 작가를 하고 있었는데 팀장은 임신했다고 그나마 일주일에 하루 나가는 출근도 빼주었다. 그야말로 온 우주가 ‘한방이’의 탄생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쯤 되면 ‘한방이’는 장차 대한민국의 위기, 나아가 전 지구적 위기에서 인류를 구원할 사명쯤은 갖고 태어나야 앞뒤가 맞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한국판 ‘사라 코너’가 될 지도 모른다.
1984년 LA 거주. 패밀리 식당 종업원. 하룻밤 정사로 미래 인간의 아이를 잉태한 속전속결 자궁의 소유자. 장차 인류를 구원할 ‘존 코너’의 어머니이자, ‘존 코너’를 보좌하는 군인 ‘카일 리스’를 남편으로 둔, 애비와 아들의 족보를 꼬이게 만든 장본인
때는 1984년, LA에 살고 있는 ‘사라 코너’. 그녀는 패밀리 식당 종업원이다. 얼마나 근무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식당 종업원을 하기엔 여러모로 어리바리하다. 지각은 물론, 서빙할 때 테이블 번호도 헷갈리고, 손님 컵의 음료수를 쏟는 등 적성 아닌 곳에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TV 뉴스 속보에서 자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연이어 살해되는 사건을 보게 된다. ‘사라 코너’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은 43년 뒤 미래, 2027년에서 온 기계인간 터미네이터다. 그가 ‘사라 코너’를 찾는 이유는 이렇다.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알파고 능력을 탑재한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1997년 핵전쟁을 일으키자 인류는 길고 긴 기계와의 전쟁에 돌입한다. 그때 놀라운 리더십과 전술을 앞세운 ‘존 코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인간들을 이끌고 기계들과 싸운다. ‘존 코너’의 등장으로 위태로워진 기계들은 아예 과거로 돌아가 ‘존 코너’의 싹을 자르기로 한다. 그를 낳은 엄마, ‘사라 코너’ 제거 작전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뭐가 어째? 기계들이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냈다고?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존 코너’는 자신의 충직한 부하,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낸다. 그런데 이런 하극상이 있나. 그 부하가 엄마랑 정을 통해 자신을 낳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겠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라 쓰고 부하라 읽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카일 리스’는 목숨을 걸고 ‘사라 코너’를 지키느라 터미네이터와 싸우게 된다. 미래에서 왔고 어쩌고저쩌고는 일단 그렇다 쳐도, 이 상황이 납득가지 않는 그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사라 코너> :
리스! 왜 나죠? 원하는 게 뭐죠?
<카일 리스> :
우린 거의 전멸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남자가 유선을 끊고 싸우라고 가르쳐 줬죠. 금속 덩어릴 고철로 부셔 버리라고. 벼랑 끝에서 우릴 구해낸 거예요. 코너라는 자였죠. 존 코너! 아직 낳지 않은 당신의 아들!
<사라 코너> :
정말 제대로 찾아온 건가요? 봐요! 내가 미래의 엄마같이 보여요? 강해 보여요? 난 수표 정리도 제대로 못한다고요. 난 이런 영예 원치 않아요. 필요 없어. 전부 다!
<카일 리스> :
당신 아들이 전해 달랬죠. 암기 시켰어요. “암흑기 당신의 용기에 감사드려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네요. 엄마는 훨씬 강한 사람이죠. 엄마가 살아남아야 제가 존재해요.”
한방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유치원 등원버스에 올라타던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닷없이 ‘사라 코너’ 생각이 났다. 나는 서른여덟에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와 나의 시간적 간극은 거의 40년이다. 40년 후 ‘존 코너’가 될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물론 인류를 구할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에서 온 아이 라는 얘기다.
그래, 먼 미래에서 누군가 내게 찾아와 “당신 아들은 미래에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될 겁니다! 잘 키워주세요!” 라고 당부를 했다 치자. 왜 하필 나인가? 운명의 신이 있다면 그는 뭘 믿고 이 아이의 엄마를 나로 정한 것일까.
나는 사라 코너를 탓할 자격이 없다. 특히 부엌 상식 쪽이 많이 약한데, 플라스틱 물통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물통을 찌그러뜨리는 건 예사고, 빵에 찍어 먹거나 샐러드에 뿌려먹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식용유처럼 사용하다가 혼났다. 끓는점이 낮아서 불이 날 수도 있단다. 게다가 마요네즈가 주원료인 타르타르소스를 냉동 보관했다가 망신만 당했다. 소스가 층층이 분해된 걸 목격하고 소스판매자에게 문의했더니 지방성분을 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혀를 내둘렀다.
사라 코너 말처럼 미래의 엄마로서 자질이 없는 내게 온 아이. 그런데 나는 툭하면 아이에게 이것도 못하냐고 비난하고, 다른 아이는 이렇던데 저렇던데 비교하면서 이따위로 아이를 키우고 있구나.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사라 코너’를 만난다. 아이에게 함부로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미래에서 온 아이.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사람. 내가 죽은 후에도 지구라는 별의 시간을 통과할 사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한다. 황량한 고속도로 주유소에 정차하는 지프차 한 대. ‘사라 코너’가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다른 한 손으로는 커다란 카세트를 들고 녹음을 하고 있다. 어느새 배가 불룩한 만삭이 된 그녀는 미래의 아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한다. “뭘 말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구나. 이다음에 크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그녀. 조수석에는 당연한 듯 총 한 자루가 놓여있다.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어리숙하고 겁이 많은 여자는 미래의 아이를 위해 기꺼이 투사가 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녀가 향하는 길의 끝에서 폭풍우가 몰려오는지 하늘이 시꺼멓다. 그때 주유소 남자가 폭풍우가 오고 있다고 말을 건네자, 가야할 길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한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때때로 잊는다. 미래에서 온 아이를 온전히 키우는 것이 폭풍우 속을 뚫고 가는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터미네이터는 울끈불끈 근육맨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맡았다. 당시 그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 발음이 그야말로 장난이었단다. 해서 감독은 터미네이터의 대사를 대폭 줄였다고 하는데 대신 그가 가진 장기만큼은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다. 미래에서 과거로 오는 타임머신은 옷을 걸치고 타면 안 되는 것인지, 그는 과거에 도착할 때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으로 뚝 떨어진다. 어머나! 그렇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지구에 있는 중2병 사춘기 녀석들과 맞장을 뜨는 장면에서 아놀드도 성이 났지만, 어흥! 그것도 성이 났다! 무엇을 기대하든 상상 이상이다. 물론 나는 스토리를 따라 가느라 돌려보진 않았다.
개봉| 1984년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장르| SF•액션
러닝타임| 108분
감독| 제임스 카메론
배우| 린다 해밀턴(사라 코너)
아놀드 슈왈제네거(터미네이터)
마이클 빈(카일 리스)
* 그 검은 상자를 저와 함께 열어보시겠어요? 어머니? (영화 '기생충' 대사 중에서)
* 영화 사진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