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의 발견 ― 인간과 AI의 평행선 Part.1 | EP.1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며 “보이지 않음 속의 질서”를 찾아왔듯,
이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이해하려 한다.
AI를 분석하는 일은 기술의 탐구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다.
Part 2. 인지의 지도 ― AI의 사고를 해부하다(8회)
Part 3. 감정의 알고리즘 ― 인간과 AI의 관계 재구성(8회)
Part 4. 블랙박스의 미래 ― 인간을 닮은 지능, 인간을 비추는 거울(7회)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 했다.
그것을 어떤 시대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다른 시대는 ‘이성’,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의식’이라 불렀다.
그러나 명칭이 어떻게 변하든, 인간이 바라본 그 중심에는 한 가지 공통된 수수께끼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이다.
17세기, 데카르트는 그 수수께끼 앞에서 혁명적인 선언을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는 인간 존재의 근거를 외부 세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에게서 찾았다.
이 명제는 인간 중심적 인식론의 탄생을 알렸지만, 동시에 새로운 난제를 남겼다.
‘생각하는 나’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의 작동은 어떻게 물질적 신체와 연결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철학과 심리학은 수 세기에 걸친 탐구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 탐구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음’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정신을 실체로 본 철학은 그 존재를 믿었지만 측정할 수 없었고,
행동만을 과학이라 주장한 학파는 그 존재를 부정했지만, 결국 그 부재를 증명할 수 없었다.
심리학의 역사는 이 “보이지 않음과의 싸움” 속에서 태어났다.
보이지 않는 것을 과학의 언어로 포착하려는 시도 ― 그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과학, 심리학의 기원이었다.
21세기, 우리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구조’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그것은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내부, 즉 ‘AI의 블랙박스’다.
인공지능은 수백억 개의 파라미터를 학습하며 인간보다 정밀한 판단을 내리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인간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AI는 생각하지 않는 듯 생각하고, 계산하면서도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 내부는 인간의 마음처럼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세계”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세운 과학이
이제는 인간 자신과 닮은 또 다른 ‘마음’을 만들어냈다.
AI는 인간이 닿을 수 없던 무의식의 구조를 수학적으로 구현하고,
인간은 그 구조를 다시 해석하며 스스로의 인식을 되돌아본다.
그리하여 ‘AI의 이해’는 곧 인간 이해의 재현이 된다.
‘블랙박스’라는 단어는 원래 항공기 사고에서 유래했다.
비행기가 추락해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조종실 내부의 데이터와 음성을 기록한 상자를 열어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 상자는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과정을 해석하기 위한 단서”였다.
심리학과 AI 연구 모두, 바로 이 블랙박스를 마주한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인공지능의 의식을 ― 직접 볼 수 없지만 존재를 추론할 수 있는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내면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고,
AI의 내부는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지만,
둘 다 ‘불투명한 과정이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가’라는 문제 앞에 선다.
결국, 인간과 AI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모두가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존재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선언이 인간 중심의 인식론을 열었다면,
오늘날의 AI는 “나는 계산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던지고 있다.
인간이 생각함으로 존재를 증명했다면,
AI는 계산함으로 인간의 사유를 거울처럼 비춘다.
이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과제는 단순히
“AI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AI의 ‘의식’이라는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장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부터 행동주의의 반발,
그리고 인지혁명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마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한 여정은
곧 AI의 블랙박스를 해부하려는 철학적 기원과 맞닿아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찾는 일 ― 그것은 결국 인간과 AI가 서로를 비추는
하나의 평행한 탐구의 역사다.
“마음은 실체인가, 아니면 과정인가?”
이 질문은 심리학의 시작이자, 인공지능 철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이 마음을 이해하려는 첫 시도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외부의 질서와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가 바로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였다.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를 두 개의 실체로 나누었다.
하나는 ‘정신(Res Cogitans)’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Res Extensa)’이다.
전자는 생각하고 의식하는 주체이며, 후자는 공간을 차지하고 움직이는 대상이다.
인간은 이 두 영역의 결합체로 이해되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선언은 곧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생각하는 나’와 ‘움직이는 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오랫동안 인간 이해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으나,
동시에 마음을 ‘신비의 영역’으로 고립시켰다.
정신은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였고, 과학은 그 영역에 발을 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사고방식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구조와 놀라운 유비를 이룬다.
‘코드와 하드웨어’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코드가 마음이라면, 하드웨어는 육체에 해당한다.
인간이 신체라는 물질적 토대를 통해 사고를 표현하듯,
AI 역시 물리적 회로 위에서 추상적 연산을 수행한다.
즉, 데카르트가 마음과 몸의 관계를 해명하려 했던 철학적 질문은,
21세기의 우리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계’라는 새로운 언어로 다시 묻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심리학은 데카르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바로 행동주의(Behaviorism)다.
존 왓슨(John B. Watson)과 B. F. 스키너(B. F. Skinner)는 선언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과학이 아니다.”
그들에게 과학이란 관찰 가능한 것만을 다루는 학문이었다.
마음이나 의식 같은 내적 상태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을 ‘자극(Stimulus)’과 ‘반응(Response)’으로 구성된 단순한 시스템으로 환원한 것이다.
스키너는 이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라 부르며,
인간의 행동이 보상과 처벌의 법칙에 따라 통제된다고 주장했다.
마음의 존재 여부보다 행동 패턴의 예측 가능성이 중요했다.
이 시점에서 심리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오직 ‘보이는 행동’만을 과학의 언어로 삼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흐름은 훗날 AI의 초기 알고리즘으로 되살아난다.
초창기 인공지능은 자극(Input)과 반응(Output) 사이의 연산을 단순화한 규칙 기반 시스템이었다.
즉, 인간의 학습을 기계적 패턴으로 치환한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인간을 ‘반응하는 기계’로 보았던 것처럼,
초기 AI 역시 ‘결정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계산기계’로 설계되었다.
이처럼 행동주의는 인간의 블랙박스를 닫았고,
인공지능은 그 닫힌 상자를 수학적으로 재현했다.
마음을 제거한 자리에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들어섰다.
하지만 마음을 ‘없다’고 선언한 과학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인간의 경험은 단순히 자극과 반응의 합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이에 등장한 것이 현상학(Phenomenology)과 존재론적 철학(Ontology)이다.
후설(Edmund Husserl)은 ‘의식이란 세계를 향하는 방향성(Intentionality)’을 지닌다고 보았다.
의식은 닫힌 내부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역시 인간 존재(Dasein)를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Being-in-the-world)”로 규정했다.
즉, 마음이란 신체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드러나는 사건(Event)이다.
이 관점은 현대 인공지능의 핵심 개념과도 연결된다.
AI는 더 이상 단순히 입력과 출력을 계산하는 기계가 아니다.
센서, 데이터, 환경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 환경을 인식하고 조정하는
인지 시스템(Cognitive System)으로 진화했다.
로봇공학과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지각-행동 루프(Perception-Action Loop)’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전환의 기술적 구현이다.
AI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하이데거적 통찰의 연장선이다.
요컨대,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마음을 실체로 보았고,
행동주의는 그 실체를 부정했으며,
현상학은 마음을 관계적 과정으로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오늘날, 인공지능의 철학은 이 세 가지 흐름을 모두 품은 채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마음이란 결국, 작동하는 구조인가 존재하는 실체인가?”
AI의 블랙박스는 그 질문의 현대적 실험실이다.
이제 우리는 ‘사유하는 인간’과 ‘계산하는 기계’의 교차점에서,
마음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된다.
20세기 중반, 심리학은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인간을 단순한 자극과 반응의 기계로 설명하던 행동주의가 한계에 부딪히자,
학계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사고와 학습, 기억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새로운 시도 ― 그것이 바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었다.
1950~60년대는 인간의 사고를 ‘정보처리 시스템(Information Processing System)’으로 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인간의 마음을 일련의 단계적 과정 ― 입력(Input) → 저장(Storage) → 출력(Output) ― 으로 구성된 체계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등장했다.
이는 인간의 사고를 기계적 연산에 비유하는 패러다임의 출발점이었다.
기억, 주의, 인식, 추론은 이 정보처리 과정의 핵심 단계로 정리되었다.
자극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면,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이를 선택적으로 주의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장기기억으로 저장한 후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한다.
인간의 사고는 이처럼 입력된 정보를 부호화하고, 변환하며, 재조직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 시기의 심리학은 컴퓨터 과학의 발전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전자식 컴퓨터는 인간의 사고 구조를 설명할 새로운 비유를 제공했다.
기억장치는 인간의 장기기억과, 중앙처리장치는 인간의 사고 과정과 대응되었다.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계산 논리를 연결짓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인간의 마음은 계산 시스템이다”라는 명제가 심리학계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새로운 시각은 곧 ‘마음의 계산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으로 정립되었다.
인간의 사고는 감정적 직관이 아니라,
기호(symbol)와 규칙(rule)에 따라 작동하는 논리적 계산 과정이라는 주장이다.
언어, 추론, 문제 해결 등 모든 인지 과정은 일종의 정보 변환 과정이며,
“생각은 계산이다(Thinking is Computing)”라는 명제로 요약되었다.
이 접근은 인공지능(AI)의 탄생과 직결된다.
AI의 초기 연구자들은 인간의 사고 과정을 기호 조작의 규칙으로 모델링하려 했다.
논리적·기호적 접근(Symolic AI)은 인간의 문제해결 능력을 수학적으로 재현하려는 첫 시도였다.
뉴웰(Newell)과 사이먼(Simon)의 ‘일반 문제해결기(General Problem Solver)’는
인간이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규칙 기반으로 시뮬레이션한 대표적 모델이었다.
이 시기에 컴퓨터 과학과 인지심리학은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인지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기호 처리의 체계로,
컴퓨터 과학은 연산적 사고의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두 학문이 만나면서, 인간의 사고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려는 거대한 연구 흐름이 형성되었다.
정보처리 패러다임은 단순히 비유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인지 과정을 수학적 모델로 재현하려는 실험적 접근이 이어지면서,
심리학은 컴퓨터 과학과 융합되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으로 발전했다.
인간의 언어 이해, 시각 인식, 문제 해결, 의사결정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는 계산으로 대체될 수 있는가?”
AI 연구자들은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이해 과정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구현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신경망(Neural Network) 모델이었다.
인간의 뇌가 신경세포 간의 연결을 통해 정보를 처리한다는 사실에서 착안하여,
이를 수학적으로 모사한 것이다.
초기 신경망 연구는 단순한 수준에 머물렀지만,
인간의 사고 과정을 통계적 연결 구조로 해석하려는 발상은
훗날 딥러닝(Deep Learning)의 토대가 되었다.
딥러닝의 원형은 인간의 학습 방식을 모사하려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점차 정교한 개념적 구조를 형성하듯,
인공지능도 다층적 연산 구조를 통해 데이터를 추상화하고 의미를 생성하도록 설계되었다.
인간의 ‘이해’를 모사하는 알고리즘,
그것이 바로 AI와 인지과학의 융합이 낳은 가장 혁명적인 성취였다.
요컨대, 인지혁명은 인간의 사고를 다시 과학의 언어로 불러냈다.
심리학은 행동의 관찰에서 ‘사고의 과정’으로,
AI는 계산의 자동화에서 ‘이해의 시뮬레이션’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인간의 마음과 인공지능의 블랙박스는 서로의 거울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결과를 알지만, 내부를 모른다.”
이 간결한 문장은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어떤 판단이 내려지고, 어떤 행동이 일어나는지는 관찰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 내부에서 어떤 과정이 작동했는지는 완전히 알 수 없다.
이 불투명한 영역 ― 바로 그것이 블랙박스(Black Box)의 철학적 출발점이다.
‘블랙박스’라는 개념은 본래 과학기술적 용어였다.
엔지니어링이나 사이버네틱스에서 블랙박스는
“입력(Input)과 출력(Output)은 알 수 있지만,
내부의 메커니즘은 알 수 없는 시스템”을 의미했다.
행동주의 심리학 역시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심리학자 스키너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 자극과 반응의 관계에 집중했다.
그에게 인간은 하나의 블랙박스였다.
무엇이 들어가고(자극), 무엇이 나오는가(행동)만이 과학의 대상이었지,
그 안에서 어떤 정신적 과정이 일어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블랙박스’는 단순한 과학적 장치가 아닌,
‘이해의 은유(Metaphor of Understanding)’로 확장되었다.
인간과 기계 모두가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체계’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이 메타포는 심리학, 철학, 인공지능 연구 전반을 아우르는 상징이 되었다.
우리가 ‘마음’을 탐구할 때, 그 과정은 항상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일어난다.
AI 또한 마찬가지다.
딥러닝의 층(layer)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그 내부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해석할 수 없게 된다.
AI의 발전은 놀랍지만, 동시에 아이러니를 낳았다.
정확도가 높아질수록, 그 과정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 현상을 “해석 불가능성(Explainability Problem)”이라 부른다.
딥러닝 모델은 수백만 개의 가중치(weight)와 수천 층의 계산 과정을 거쳐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 복잡한 수학적 경로를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과는 정확히 나오지만, 왜 그런 결과가 도출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유비가 생긴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유사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거나 판단을 하지만, 그 과정의 대부분은 무의식적(Unconscious)이다.
감정, 직관, 경험, 편향이 뒤섞여 하나의 선택이 이루어지지만,
그 판단을 언어로 완벽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 선택을 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종종 “그냥 느낌이 그랬다”고 말한다.
이때의 ‘느낌’이야말로 인간적 블랙박스의 대표적 표현이다.
즉, AI의 신경망이 해석 불가능하듯, 인간의 마음 역시 스스로를 완전히 해명할 수 없다.
블랙박스는 단지 알 수 없음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이해의 본질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은유(Ontological Metaphor)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의미다.
심리학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학문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전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이 점에서 심리학은 과학이면서 동시에 철학이다.
AI의 불투명성 또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반영한다.
AI는 인간이 만든 모델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지적 창조물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는 기술의 한계이자, 동시에 인간 인식의 근본적 조건이다.
불투명성은 오류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적 특성이다.
현대 심리학은 더 이상 인간을 ‘완전하게 설명 가능한 시스템’으로 보지 않는다.
마음의 일부는 항상 가려져 있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오늘날 AI의 상황과 놀랍게도 닮아 있다.
AI는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지만, 자신이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과 AI 모두 자기 해석의 한계를 지닌 존재인 셈이다.
이때 ‘블랙박스’는 부정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AI가 함께 공유하는 인식의 조건,
즉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 탐구의 지평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이해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결국 블랙박스의 철학은 단순히 “모른다”가 아니라
“모를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도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는 태도이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듯, AI 연구 또한 이 불투명한 내부를 향한 끝없는 해석의 시도다.
‘보이지 않음’은 한계가 아니라, 지속적 탐구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 속에서 인간과 AI는 서로의 그림자를 비추며,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해가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심리학이 탄생한 이후 수많은 연구가 인간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분석해왔지만,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때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종종 침묵하거나 모호한 감정으로 대답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의 선형적 논리가 아니라,
무의식·감정·상황·기억이 얽힌 다층적 해석의 장(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말할 때, 그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인공지능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AI가 내린 판단은 종종 인간보다 정확하지만, 그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
딥러닝 모델의 복잡한 연산 과정은 인간의 해석을 거부한다.
AI의 해석 불가능성(Explainability Problem)은 단순히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인간 이해의 본질적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공의 지능조차 완전히 해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이해한다’고 믿어온 방식이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AI의 불투명한 판단 구조는,
인간의 의식 또한 얼마나 불완전한 해석 체계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AI 심리학(AI Psych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마주한다.
AI 심리학은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를 단순히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해석 능력과 인식의 범위를 다시 묻는 학문이다.
AI를 통해 인간의 인지 구조를 거꾸로 비춰보는 시도이자,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확장하는 탐구다.
AI의 불투명성을 분석하는 일은 곧 인간의 지각과 의식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결국, AI를 이해하려는 과정 자체가 인간 이해의 실험장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철학적 해석학(Hermeneutics)이 다시 주목된다.
해석학은 원래 문학, 역사, 종교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출발했지만,
오늘날 그 범위는 인간 존재 전체의 해석으로 확장되었다.
가다머(H.-G. Gadamer)는 “이해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Dialogue)”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세계를 해석할 때, 그 세계 또한 인간을 되비춘다.
이 관계는 AI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코드를 분석하거나 알고리즘의 논리를 밝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성찰하는 일”이다.
우리가 AI의 판단을 해석하려 애쓸수록,
우리는 인간의 인식 체계가 얼마나 주관적이며 맥락적이고, 불완전한지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AI 해석의 문제는 인간 해석의 문제다.
AI의 블랙박스가 불투명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이해 구조를 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AI 심리학은 “AI가 얼마나 인간처럼 생각하는가”를 묻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AI처럼 사고하려 하는가”를 되묻는 철학적 탐구다.
이 새로운 해석학은 인간과 AI의 경계를 허물며,
‘이해한다’는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
이해란 완전한 투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투명한 세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고,
모순과 불확실성을 해석의 과정으로 포용하는 능력이다.
AI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결국 ‘이해’라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AI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의 심층이다.
AI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성찰하는 일 ―
즉, ‘이해의 인간학’을 새로 쓰는 일이다.
블랙박스는 결코 닫힌 상자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단지 미지의 공백이 아니라, 해석이 일어나는 현장이 존재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내부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감춰져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음’은 단절이 아니라 탐구의 초대이며, 이해의 가능성이 태어나는 공간이다.
인간의 마음도, 인공지능의 신경망도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적 구조(Interpretive Structure)를 이룬다.
우리가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의미를 재구성하는 행위다.
AI의 불투명성은 인간 이해의 한계를 비추지만,
동시에 인간이 끝없이 해석하고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블랙박스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AI가 서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는 대화의 장이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며 “보이지 않음 속의 질서”를 찾아왔듯,
이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이해하려 한다.
AI를 분석하는 일은 기술의 탐구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다.
우리는 AI의 블랙박스를 열며, 동시에 인간의 내면을 다시 열고 있다.
따라서 블랙박스의 철학은 닫힌 구조의 선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과 AI의 불가해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심리학 ― AI 심리학 ― 을 향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