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구어체는 좀 멋이 없지 않나. -구어체로 써보십시오. -좀 멋이 없지 않나요? 아니, 제가 쓰기에 말예요. 선생님의 제안에 나는 단박에 말했다. -혜미씨의 말솜씨에 비해 글 속에서는 그 재미가 잘 보이지 않아서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글에 그대로 써보시면 좋겠는데요? 말솜씨가 좋다는 얘기는 묘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대로 써보라는 것이 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제안한 이유를 알고 있다. 몇 년간 글을 써와도 언제나처럼 비문이 넘쳐나니까. 선생님은 내가 또 다른 이유를 대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문법은 일종의 규칙이다, 그 규칙에 익숙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외국어로 쓴 것처럼 어색한 문장이 된다, 맥락만으로 의미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런 어색함이 반복되면 독자가 피로를 느껴 글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접 쓴 글에 “그 매미는 나무에서 울고 있는 소리였다”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말하려는 이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어도 ‘울고 있는 소리였다’라는 표현과 ‘에서’ 조사가 어색하게 쓰여 순간 멈칫하게 되었다. ‘매미가 나무 위에서 울고 있었다’거나 ‘매미 울음소리가 나무에서 들려왔다’처럼 썼더라면 훨씬 선명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조사 하나, 동사 하나가 글 흐름의 리듬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글을 합평하며,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대부분 글쓴이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문에 대한 얘기는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크게 서운하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규칙’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아 그 규칙을 꼭 지키고 싶어졌다. 한편,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가지런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절제미가 돋보이는 분위기의 글이다. 문제는, 그런 가지런한 문장을 이루기 위한 규칙을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나는 구어체로 글 한 편을 당장 써보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멋이 없는지를 선생님께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니까.
‘나에게 정말 말솜씨가 있는 걸까?’
그저 분위기를 잘 파악해서 재미있고 진지한 이야기를 골라낼 뿐, 논리정연하지 않은 나는 ‘말솜씨’라는 말이 과연 나에게 해당되는지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내 말솜씨는 화법보다는 화술에 가깝다.
-‘화법’과 ‘화술’은 둘 다 말을 다루는 능력에 관련된 용어이지만, 그 의미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화법(話法)은 말하는 방식이나 방법을 의미한다. 이는 어떻게 말을 구성하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의 구조, 문장의 선택, 말투, 어조, 그리고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등 말의 형식적인 측면에 더 중점을 둔다. 화술(話術)은 말을 잘하는 기술 또는 예술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말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넘어서, 청중을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능력을 포함한다. 화술은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방식, 말하는 사람의 카리스마, 이야기의 흥미로움, 청중을 끌어들이는 능력 등을 포괄한다.- 고 챗GPT가 정리해줬다.
나의 말솜씨는 20대에 일했던 옷가게에서 발전한 것이고, 당시 나는 손님들에게 인기좋은 옷가게 언니로서 옷을 참 잘 팔았다. 그때 나는 꽤나 감각 있게 옷을 잘 입었고, 손님에게 잘 어울리는 코디 실력을 뽐내 단골이 속출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치트키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화술이었다. 나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눈치채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목소리의 높낮이나 표정으로 집중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칭찬과 조언을 적절히 섞어서 응대하고 나면 손님들은 쇼핑백을 어깨에 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나가곤 했다. 글 속에도 화술을 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내가 글을 직접 읽어준다면 은근슬쩍 조사도 빼고 이상한 어미 처리도 자연스럽게 눙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을 글로, 그것도 문법을 갖춰서 쓰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글의 이유는 뭘까.
내가 추구하는 글의 멋은 여운이 긴 어떤 의미를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 옷을 입을 때도 글을 쓸 때도 나는 멋진 사람이고 싶다. 글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 모양으로 형성 무궁무진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이를테면 옷과는 달리 글자를 능동적으로 읽는 사람만이 이야기에 빠질 수 있다. 글자를 크고 작게, 또는 색을 입힌다고 해서 나의 글이 술술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마침표 찍은 한 문장에서 감동을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느끼는 것, 그것이 나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제된 느낌의 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분하게 쓰고 싶다. 이성적인 시선으로 어떤 마음이 생겨난 것에 대해 우연의 결과가 아닌 필연의 결과로 사유해서 냉소적이면서도 예리한 나의 시선을 전달하고 싶다. 이를 테면 문어체적인 정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인 것 같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서술하는 것에 대한 이상. 그것이 이상이라고 깨달은 후에 나는 구어체를 정말 한번 써보고자 솔직한 마음을 담은 편지 형식의 글을 썼다. 편지 형식이란 진짜 편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술술 써지고 뭔가 치사하면서 짠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느낌은 너무 개인적이진 않나. 늘 뭔가 더 내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과는 달리 지루하다는 말을 들으리라. 그런데 왠일로 예상이 빗나갔다.(혹은 역시) 그 동안의 글 중에서 제일 좋았고 문장이 잘 정리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사람들은 내 글에서 따뜻한 감정이 느껴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눈치 챘겠지만 나는 정제되기 어려운 감정을 갖은 사람이다. 망설임 없이 말을 하고 중의적 표현을 많이 하며 복잡한 감정을 전달할 때는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한다. 그래서 결국 호소력이 생기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합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바쁘고 고된 하루’라는 핑계로 어느 날 문득 쓸쓸해진 마음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서 새삼스레 느낀 충만한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꾹꾹 눌러 모은 이야기 써왔던 것인데 그게 내가 원하는 분위기로는 표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냥 편하게 떠오르는 데로 가다듬어 쓰다 보니 어느새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운 대화에 유리한, 또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지극히 구어체적인 인간인 것이다. 내가 거부했던 내 모습이 알고 보니 꽤 다정했다는 사실이 조금 유감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