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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2025.02.24.)

by 임상구 변호사

Vincent van Gogh - <The Potato Eaters> - Van Gogh Museum



가난이란 전염병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현대 비폭력 평화주의와 리얼리즘, 그리고 실존주의와 같은 사상에 영향을 끼친 대문호라 할 수 있는데요.

그럼, 여러분은 그 둘 중에 누굴 더 좋아하세요?

아~ 둘 다 싫어하신다구요? ^^

그럴 만도 하죠.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그 이름조차 외우기 힘드니까요.


제 개인적으로 톨스토이 작품은 몇권 시도만 했을뿐 완독하진 못하여 대충 들어 알 뿐이고,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역시 ‘카라마조프’ 읽어보려다 책을 덮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다만, ‘죄와 벌’의 전작이 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중편소설인데다 좋은 번역본을 만나서였는지 잘 봤던 기억이 있어요. 참고로 ‘죄와 벌’은 요즘 사적 복수 장르가 크게 유행하면서 그 기원이 되는 작품으로 재조명받고 있던데, 예를 들면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감’에선 대놓고 이 책을 출연시키더군요.




아무튼 전 20대 중반께야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거 같은데... 사실 좀 놀랐다고나 할까요. <표현력이나 심리묘사가 지금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천재적이었구나>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그 중 '가난한 사람들'이란 책에서 제 마음에 와 닿았던 명대사 하나가 있는데, 나중에 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그 의미를 체감하고 제 머리 속에 각인되었던 문장이라 소개드립니다.


가난은 전염병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해요.
붙어 있으면 더 심하게 전염되고
결국 우리 모두 죽을 거에요



<19세기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행복동 난쏘공과 가난의 팬데믹



시간이 흘러 과학기술에 터잡은 물질문명이 발달되고 있지만, 빈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요.

가난은 가난을 부르고, 파산은 또 다른 파산을 부릅니다.


국내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아마도 故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일 겁니다.

1970년대 재개발 철거촌 현장을 배경으로, 간결하고도 힘이 있는 필체로, 그리고 환상과 은유를 포함한 상징적인 문장으로 도시빈민의 실상을 보여준 작품인데, 비참한 현실을 끝까지 몰아 세우는 장면들에서 다소 충격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이 시간부터 우리 가슴에 철 기둥 하나씩을 심어넣자.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 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난장이 아빠 김불이에겐 영수, 영호, 영희란 이름의 3자녀가 있습니다. 지금와 생각해보니 빼어남이 사라지고(0秀), 호탕함이 없어지고(0豪), 기쁨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0喜)는 뜻인거 같네요. 물론 어린 시절 첫째는 대기업 취업을 희망할 정도로 빼어났었고, 둘째는 호탕한 성격에 뭐라도 될 놈이었으며, 막내는 집안의 기쁨이고 순수 그 자체였죠.


가난한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게 아니라 가난 자체가 죄라 하죠. 그런데 가난은 나랏님도 어쩌지 못한다고 하니, 난장이, 꼽추, 앉은뱅이 그들로 대물림되고 전염되는 가난 속에서, 지긋지긋한 가난. 그 가난 냄새가 싫어 누군가는 맘속 사랑이 있는데도 몸을 팔고, 살인을 하고, 부모자식을 팔며, 또 누군가는 정신을 놓고 달나라로 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죠. 어떤 대목에선 '죄와 벌'의 남녀 주인공, 로지온과 소냐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악한 자들은 부와 명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메피스토에게 양심과 영혼을 팔고, 종교를 팔며, 약자들을 짓밟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 소설은 12편인가 하는 연작 단편들을 묶어 낸 작품인데, 수학시간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를 주제로 한 단편도 나와요. 안과 밖이 연결되고, 선이 악으로 오염되며,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죠. 그래서 작가는 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난장이의 이름을 김불이(不二)라 지었나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큰 아들 영수가 말하는 <가슴 속 철 기둥>은 '희망'이라기 보다는 '악'이자 '깡'이고, 또 다른 '비극'이기도 했습니다.


2025년 현재. 물리적, 장소적 의미를 떠나 삶의 기반을 잃은 철거촌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나아가 단순히 한 가정과 지역사회의 전염을 떠나 <가난의 팬데믹>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KUSkclql1WI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반 고흐의 작품 중에 <감자먹는 사람들> 또한 산업혁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던 빈곤의 19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여러 편의 습작을 거쳐 완성된 건데, 이 비극의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 왠지 모를 따뜻함이 어려 있다는 게 묘하네요.

특별한 치료법도 없는 '가난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감자로 기근을 이겨나가는 장면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만찬의 장면을 연상했다고 해요.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1885. 출처 : www.vangoghmuseum.nl




신약성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뭇백성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죠(마태복음 제5장).



아~ 참! 예수께서 현실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어요?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은 권력을 가진 엘리트에게나 덕담으로 할 소리지, 어떻게 어중이 떠중이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할 소리에요?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은, 별 하나 하나에 담은 노래와 추억들 때문일텐데요.

저의 최애 앨범 중 하나였던 <정태춘, 박은옥 6[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중에서 제겐 별과 같았던 노래 하나 소개 해드립니다.

특히 지하철이 한강 철교를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였죠.

참고로 음악의 취향은 좌우나 색깔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꼭 기억해 주시구요.



https://www.youtube.com/watch?v=vir4EHc9qtU




우리는 긴긴 철교 위를 달리는

쏜살같은 전철에 지친 몸을 싣고

우리는 그 강물에 빛나던 노을도 진

아~ 어두운 한강을 건너 집으로 집으로 졸며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창백한 불빛아래 겹겹이 서로 몸 부대끼며

사람의 슬픔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곳도 이 열차의 또 다른 칸은 아닌가

아 그 눈빛들 어루만지는 그 손길들

우리는 이 긴긴 터널 위를 실려 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어서는 안 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괘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무거운 눈꺼풀이 잠시 잠기고

깜빡 잠에 얼핏 꿈을 꾸지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거기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만한 인생 그 아름다운 사람들

매일처럼 이 열차를 기다리는 저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 아니 우리들 모두를 태우고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내려서는 안 되지

마지막 역과 차량기지를 지나

열차와 함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우리는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우리는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우리는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우리는




가수는 예수의 말에 희망을 걸어보는 듯 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보릿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오병이어)를 나누었더니 군중 모두가 배부를 수 있었듯이, <가난의 연금술>이 존재한다 생각한 것 같아요.


내가 가난에 처한 이유를 알고 내 존재의 실체를 각성할 때,

우리는 고된 하루하루를 지우개로 지우듯 살아내는 NPC가 아니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화물칸에 실려가는 짐짝들도 아니며,

설국열차 앞 칸으로 맹목적으로 몰려가는 자들도 아니란 거죠.


가수는 꿈꿉니다.

우리가 탄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갈 거라고 믿으면서요.



(2025.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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