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결의 기술.

가끔 냉동실에 들어가고 싶어.

by 적적

복층 오피스텔에 붙박이로 들어간 중고 냉장고. 식은 볶음밥과 무기력하게 얼어붙은 만두, 그사이에 미끄러져 들어간 상상 하나. 문이 닫히고, 그 안에서 얼어붙기 전까지의 시간을 천천히 되새긴다. 컴프레서가 웅—하고 울리는 동안,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차가움은 언제나 기억보다 빠르다.



여름의 오후는 온 집안을 점막처럼 덮고, 거실을 맨몸으로 빛이 설탕처럼 흘러내린다. 그 빛은 끈적이고 무겁고, 달다. 몇 숟가락의 설탕만으로도 몸은 실을 뽑기 시작한다. 천천히, 말없이, 솜사탕이 된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뼈는 녹고, 피부는 흐물거리고, 중심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하얀 실의 구름. 말이 사라지고, 언어의 구조는 설탕 아래서 흐물흐물 녹는다. 발목을 잡는 손이 있다면, 끈적한 단맛을 만지게 될 것이다. 그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면, 공중에서 솜사탕은 말없이 흔들릴 것이다. 입을 열 수 없고, 이름도 없고, 대답도 없다. 그 상태로 냉동실에 넣는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맛은 고정되고, 부풀었던 감정은 얼어붙는다. 안쪽 깊은 서랍 아래에 눕혀지는 순간, 여름은 밖에서 천천히 지워진다.

냉장고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건 모란뿐이지만...일부러 안열어줄지도.. 전 고양이예요


모란이라고 불리는 고양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냉동실 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발꿈치를 들고, 뒷다리를 모으고, 냉기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믿는다. 뛰어오르는 순간, 고양이는 고양이의 형태를 벗는다. 문은 살짝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숨결 속에 있는 것은, 언어를 잃은 설탕의 구름. 다시 말해지지 않는 몸. 모란은 그걸 알아볼까. 그 안에 있었던 것이 한때 여름을 함께하던 존재였다는 걸 알아챌까.

그 문을 연다 해도, 솜사탕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건 희미한 단맛의 결정. 고양이는 그것을 핥지 않는다. 대신 잠시 멈춰 서서, 긴 시간 동안 눈을 깜빡인다. 고양이의 눈 속에서 여름이 꺼진다. 고양이는 다시 발을 모으고, 점프할 준비를 한다. 아직 열지 않은 문이 많기 때문이다. 여름은 끝나지 않았고, 설탕은 여전히 몇 숟가락 남아 있다.



입김이 유리 선반에 닿을 때마다 사라지는 모양이, 어릴 때 벽에 대고 하던 숨바꼭질 같다. 상대는 없고, 숨는 쪽만 존재하는 게임. 냉동실 속은 그런 공간이다. 누군가 꺼내줄 거란 가정 없이 들어가는 것이 핵심. 그래야 덜 초조하다. 희망은 언제나 동상보다 빠르게 무너지므로.



첫 번째 냉동실은 이 층집 작은 부엌에 있었다. 냉장과 냉동의 구분이 없던 시절, 고기를 얼리면 차가운 물고기처럼 변했다. 포장을 벗기고, 신문지로 둘둘 말고, 다시 하얀 봉지에 넣는 동작. 그 무렵의 시간은 언제나 3단계로 보존되었다. 생에서 삶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조리로. 냉동은 그것들의 중간쯤에 존재했다. 완전히 잊히지 않도록, 완전히 기억나지 않도록.


이런 식의 생각도 가능했다. 냉동실은, 실은 타임캡슐이다. 서늘함 속에 묻힌 날짜들, 겹겹이 쌓인 유통기한의 시간들. 누가 언제 넣었는지 모르는 케이크 조각 하나가 발견될 때의 그 무심한 반가움. 혹은, 과거의 나로부터 온 암호문 같은 것. “2024. 12. 11. 미역국.” 손글씨는 뚜껑 위로 삐뚤게 쓰여 있었다. 미역은 사라졌고, 검은 국물만 남아 있었다. 사연이 씻기고, 의도는 증발한다. 이곳에선 무엇이든 의도보다 냉기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냉동실에 들어가고 싶은 날은 언제나 대화가 끊긴 날과 닮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 누군가와 싸우고, 혹은 애매하게 웃으며 대화를 끊은 뒤, 돌아서면 찾아오는 그 짧은 정적. 말 대신 냉기가 흐르고, 숨 대신 입김이 떠오른다. 그런 날의 몸은 말보다 냉동실에 가깝다. 입을 닫고, 시선을 피하며, 조금씩 차가워진다. 외부의 온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부의 감정이 자동으로 결빙되는 구조. 그 안에는 절대 ‘그만 좀 하라’는 말도, ‘미안해’라는 말도 들어가지 않는다. 말은 상하기 쉬우므로, 냉동실에는 넣을 수 없다.



냉동실에 들어가는 상상을 처음 한 건 아마 유통기한을 넘긴 딸기잼 때문이었다. 유통기한은 일종의 경고다. “이 날짜를 넘기면 위험할 수 있음.”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 경계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 3일쯤 지난 우유, 1주일쯤 지난 족발. 냉동실은 그런 반항의 증거물로 가득 차 있다. 냉동실 속에서 유통기한은 유예된다. 살아 있지는 않지만 죽지도 않은 상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면 상하지 않듯, 어떤 감정도 동결하면 버틸 수 있다. 물론 그건 임시적이고, 위험한 착각이라는 점에서 잼보다 더 오래 상한다.



때때로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들여다보는 그 행위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낯선 것이 튀어나온다. 오래된 멸치육수 팩이나, 반쯤 녹아버린 고등어. 잊고 있던 상처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문을 열 때마다 약간의 각오가 필요하다. 실망하지 않을 만큼의 기대, 냉동실이야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런 상상을 하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냉동실은 통제 가능한 고립이기 때문일 수 있다. 바깥세상의 고립은 언제나 타인의 손에 달려 있다. 차단당하거나, 외면당하거나, 혼자 남겨지는 일은 그 자체로 무질서하다. 하지만 냉동실은 다르다. 그곳에 들어가는 건 자발적이다. 스스로 문을 닫고, 스스로 차가워지는 행위. 그래서 더 안심된다. 이것은 선택된 동결이다.



가끔은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 냉장고 안에서 손전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바깥에서는 누군가 우유를 꺼내려다 이상한 기척에 멈춘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하얀 입김이 빠져나온다. 그 순간, 조용히 눈을 마주치는 상상. “여기 있었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시간이 해동된다. 하지만 실제 냉동실은 그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엔 눈도, 손도, 목소리도 없다. 그저 온도와 유통기한, 그리고 작은 성에뿐.



때로는 이런 비현실적인 장소에 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생이 잠시 고요해진다. 냉동실은 일종의 잠복 지대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어떤 해명도 필요 없는 온도. 얼어붙은 채로 존재하는 자의식.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처절하고, 불편하며, 무엇보다 서늘하다.



냉동실 속을 떠올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곳이 너무나 정확하게 현실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꺼내려다, 다시 닫아버리는 마음.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갔다 나온 적 있는 곳. 상한 감정, 버려진 기대, 얼어붙은 말들로 가득한 장소. 그리고 어쩌면 가장 깊은 곳엔, 꺼내지 못한 진심 하나쯤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냉동실에 들어가는 상상은 단지 차가움 속에 웅크리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를 잠시 멈추어 두는 기술이다. 얼어붙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질문, 보내지 않은 메시지, 닫지 못한 문장. 그것들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온도로 밀어 넣고, 언젠가 꺼내 볼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 냉동실은 모든 감정의 종착역이 아니라, 보류의 장소다. 그 안에서 감정은 죽지도, 완전히 살아나지도 않지만, 일정한 냉기에 오래 머물면 형태가 바뀐다. 원래의 이름을 잃고, 새로운 이름 없이 버티는 상태. 시간이 흐를수록 꺼내기 두려워지는 그런 것들. 그렇게 얼려두는 감정은 어쩌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다.



냉동실의 어둠은 별처럼 고요하다. 그 안에서 기다리는 상상은, 실은 누군가의 손을 향해 미세하게 움직이는 구조다. 꺼내달라고 말할 수 없고, 문을 두드릴 힘조차 없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기다림뿐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조차 냉기 속에선 무색하다. 시간이 흘러도 말라붙지 않고, 썩지도 않는 감정의 잔여. 시간이 멈춘 곳에서조차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실은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장 깊고 조용한 사랑은 목소리 없는 냉동실 안에 숨어 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문을 열고, 빛이 한 줄기 스며들 때. 그 냉기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망각해 버린 감정의 형태다. “아직 있었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군가 꺼내든 마음 조각 하나. 그것은 변질되었을지도, 혹은 여전히 유통 가능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한 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라지지 않고, 사라진 척하고 있었던 것. 동결이라는 고요한 방식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



결국 냉동실에 들어가는 상상이란, 외면당한 감정이 마지막으로 택한 은신처에 관한 이야기다. 차가운 무력함과 미세한 희망의 공존, 아무 말 없이도 전해지는 구조. 상상은 그곳에서만 가능한 유일한 언어다. 차갑고 무겁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안심되는 언어. 어떤 사랑은, 어떤 분노는, 어떤 기억은, 그렇게 얼어붙은 채로 가장 오래 남는다. 아무도 꺼내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말 한 조각, 그 얼굴의 단면, 그날의 온도 하나가. 누군가 문을 여는 순간,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사실. 모든 기다림은 언젠가 틀어쥘 손 하나를 향한 엷은 가정이다. 얼어붙은 진심은 바로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냉동실 안에서 숨을 죽인다.



그래서 냉동실에 들어가는 상상은 계속된다. 하루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 문을 닫고, 누군가가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일.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가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가벼운 오해 하나쯤은 품은 채로. 그 오해가 얼어붙기 전에.



혹은 완전히 녹아내리기 전에.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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