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들의 낙하

누구나 손 안엔 절벽이 있으므로.

by 적적


그날 이후, 기억은 이상하게도 특정한 속도로만 재생되었다. 마치 세상 모든 움직임이 평범한 속도로 흘러가는데, 그녀의 손끝이 스쳐 간 순간만은 유난히 느린 셔터로 포착된 것처럼 질감이 늘어나고, 온도가 바뀌고, 색이 짙어지며, 처음 본 사물의 결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 기억 속에서 손과 손이 닿는 장면은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 공기와 조명, 온도와 미세한 움직임이 모두 개입한 하나의 장면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아주 깊은 곳에서 은폐된 채 떠오르는 장면. 마치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에 빛이 처음 켜질 때처럼, 검은 어둠 속에서 형태가 불쑥 드러나는 방식으로.



특히 그날 그녀가 손을 놓는 방식은 어딘가 현실의 속도와 어긋나 있었다. 손을 놓아야 할 순간 이후에도 몇 초쯤 더 붙잡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실제로는 떨어졌음에도 피부 아래 어딘가에서 아직 닿아 있는 듯한 착시가 계속되었다. 손바닥의 얕은 굴곡에 남은 미세한 감각들이 뒤늦게 퍼져나가며, 등줄기까지 이어지는 잔향처럼 번졌다.


부드러운 통증 같기도 하고, 오래된 음악의 마지막 음처럼 사라지기 직전의 떨림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몸은 어떤 비밀스러운 신호를 읽어낸 것처럼 반응했고, 그 반응은 종종 늦게 도착하는 파동처럼 오후의 그림자 속에 오래 머물렀다.



그 감각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언제나 똑같았다. 손과 손이 완전히 분리되기 직전, 약지가 손바닥을 가볍게 훑어 올라가던 찰나였다. 아주 얇은 막을 가르는 듯한, 혹은 투명한 액체를 지나가는 듯한 감각. 그 찰나가 고요한 바람처럼 스쳐 가면서, 몸 어디선가 잊고 있던 부위가 서서히 깨어났다.


시간이 느려진 것은 몸 때문이 아니라, 감각이 그 순간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장면. 심지어 그 순간의 빛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한낮의 밝음 속에서도, 그녀의 손끝이 지나간 경로는 늘 아주 미세하게 어두웠다. 마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음영을 조절한 듯한 효과가 촉각 아래에서만 은밀하게 발생했다.



그녀의 손이 떠난 뒤에도 오래 남았던 것은 굳이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었다. 그 파편들은 이유나 의미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을 거부하듯, 그저 감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남은 감각은 문득 손가락을 구부리는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되살아났고, 손에 닿는 공기의 밀도 변화만으로도 되풀이되었다.



어떤 순간에는 그 기억이 스스로 꿈처럼 변형되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부들이 천천히 추가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손을 놓는 순간 공기 중에 퍼지던 미묘한 향기나, 약지가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움찔했던 손바닥의 움직임 같은 것들이, 실제보다 더 서늘하고 더 은밀하게 기억 속에서 재조립되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의 손가락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마른 뼈마디가 얇은 피부 아래에서 은밀히 움직일 때마다, 그 손끝에는 보이지 않는 절벽이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요한 방 안에 놓인, 이름 없는 절벽 한 조각. 손끝이 조금만 흔들려도 금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그런 위험한 기울기. 이상하게도, 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다는 충동이 아주 잠깐씩 찾아오곤 했다.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충동. 그도 모르게 손끝에서 발아된 어떤 그림자 같은 욕망.



만지고 싶은 것들은 언제나 분명했다. 고양이의 축축한 콧등, 새벽 공기처럼 얇은 온기로 부피가 녹아내리는 솜사탕, 손가락 틈새로 사라지는 비눗방울의 표면 같은 것들. 하지만 만져지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이었다. 그건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서 ‘만져지고 싶다’는 욕망이, 미세한 전류처럼 몸 어딘가에서 깜박이기 시작한 건.


여성으로서, 혹은 단지 한 사람으로서도 낯설기만 한 그 감정은, 마치 제 주인을 모른 채 무심히 방 안에 놓여 있는 검은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녔다. 다룰 줄도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방치해야 하는 감정. 손대면 모양이 변할까 두려운, 조용히 잠복해 있는 체온 같은 감정.



그와 마주 앉아 있던 어느 저녁이었다. 실내의 불빛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그의 윤곽을 몇 번이나 겹쳐 보여주고 있을 때, 문득 그는 손을 내밀었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제스처는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인사처럼. 그러나 그의 긴 손가락이 내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순간, 세상이 아주 작은 떨림을 중심으로 다시 배열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 잠들어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며 부스러기처럼 몸 안에서 흩날렸다.



그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내 손등을 스친 순간, 감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손끝이 닿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안쪽은 어둡고 따뜻하며, 살갗을 간질이는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문. 그 문턱 너머에서는 낯선 여자, 즉 지금의 나와 조금 다른 결의 여자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여자는 욕망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낯섦을 피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만져지고 싶어 하는 여자의 체온을 눈치채면서도, 흘려보내지 않는 여자였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내가 알고 있던 감각의 모든 규칙이 흐트러졌다. 손끝은 더 이상 단순한 접촉의 도구가 아니었고, 두 사람 사이의 비밀스럽고 조용한 번역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의 체온은 내 손바닥을 따라 팔목으로, 어깨로, 천천히 훑듯이 올라왔다. 그 움직임은 한 문장도 틀리지 않게 읽히는 책과 같았다. 책장은 바람 한 줄기 없이 넘어가는데도, 안의 문장들이 나를 스스로 읽어내리는 기묘한 독서.



악수는 이미 악수가 아니었다. 그 접촉은 더 오래, 더 깊게 머물려고 했다. 손과 손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은 열기가 두 사람을 천천히 감싸며, 어둠 속에서만 들리는 조용한 숨소리처럼 정적을 흔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조금만 더 움직였더라면, 그 절벽 아래로 정말로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추락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름다운 형태로 완성되는 어떤 낙하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을 놓는 순간, 세상의 향과 빛과 기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지만, 내 손바닥에는 여전히 열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온도 차이가 그림자처럼 남아, 밤이 깊어질수록 더 분명해졌다. 마치 그의 체온이 손끝에 조용히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은근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처럼.



그날 이후, 나는 그의 손을 떠올릴 때마다 문득 어떤 감정이 몸 안에서 모습을 바꿔가며 부유하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형태였다. 사랑도 아니고 욕망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 손끝의 언어로 번역된 감정. 절벽의 끝에서 잠시 흔들리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여자의 체온. 그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과 내 손이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던 그 순간이었다. 서로의 체온이 닿아 있던 자리가 자연스럽게 식어가며, 악수의 끝이 단지 예의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장면처럼 사라져 갈 때, 나는 약지 손끝을 아주 느리게 그의 손바닥 안쪽으로 미끄러뜨렸다. 그것은 거의 움직임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스침이었지만, 내게는 심장을 벗겨내 듯 대담한 행위였다.



그가 그 움직임을 알아채기를 바랐다. 혹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간절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두 감정은 불안한 실처럼 얇게 뒤섞여 있었다. 손끝이 그의 손바닥의 선을 따라 아주 천천히, 시간이 멈춘 듯이 가라앉아갈 때마다, 마치 금지된 비밀을 손바닥에 적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비밀이 그의 체온 속으로 번져 들어가게 되길 바라며, 또 동시에 절대로 닿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욕망이 몸 안에서 서로 얽혀 들었다.



아마도 그 순간 나는 바람이 닿아 흔들리는 촛불처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떨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알림과 은폐, 노출과 은유가 뒤섞인 그 스침의 마지막에서, 그의 손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거나, 혹은 그것마저 내 상상 속의 미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내가 그의 손바닥을 스쳐 지나가면서 짧은 순간 허락했던 감각의 진폭이었다.



그 흔들림이 사라지기 전에 손을 거두었다. 손끝의 열은 이미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동안 내 약지에 남아, 마치 그를 향해 조용히 되감기고 있는 감정의 잔향처럼.


오래도록 진동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이전 11화달콤한 위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