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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돌.

과정의 온도, 결과의 밀도

by 적적


https://www.youtube.com/watch?v=zcGU9E94wTY&list=PLjuDlTa33vsGps-kKhPla2aIzTihwtx3_&index=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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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두 가지 표정이 있다. 손끝에서 눌려 형태를 얻는 말의 얼굴과, 차갑게 벼려져 한 번에 형체를 드러내는 문장의 얼굴. 전자는 소조이고, 후자는 조각이다. 하나는 물기를 머금은 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숨기지 않고, 다른 하나는 완결의 포즈를 취하며 더 이상 덧붙일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둘은 재료의 차이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소조의 글은 흙의 언어를 닮았다. 물을 머금은 진흙처럼, 그것은 손의 온도를 기억한다. 만졌던 자국, 눌렀던 자리, 망설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글쓴이의 맥박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로 문장 사이에 웅덩이를 만든다. 문장은 매끈하지 않고, 조금은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그 울퉁불퉁함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흙은 금이 가면서도 다시 붙고, 잘못된 선을 긁어내고 다시 덧붙일 수 있다. 소조의 글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수 위에 새로운 형체를 얹는다.



조각의 글은 돌의 언어를 닮았다. 한 번의 타격이 되돌릴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문장은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삭제는 곧 파괴이고, 덧붙임은 균열이 된다. 돌은 처음부터 완성을 예감하며 존재한다. 작가는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사람일 뿐이다. 조각의 글은 무엇을 더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에 집착한다. 그 집착이 날카로운 윤곽을 만든다.



소조의 글을 쓰는 이는 시간을 믿는다. 오늘의 문장이 내일의 문장과 부딪히며 자연스럽게 모양을 바꾸리라는 낙관을 품는다. 조각의 글을 쓰는 이는 순간을 믿는다. 단 한 번의 문장으로 독자의 숨을 멈추게 하려 한다. 하나는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번개처럼 번뜩이는 표정이다.


젖은 흙을 만지면 손에 묻는다. 소조의 글을 읽으면 감정이 묻어난다. 그것은 독자의 손바닥에도 번진다. 글쓴이의 망설임, 두려움, 욕망이 그대로 전염된다. 문장은 조금은 느슨하고, 대신 숨을 쉴 공간이 있다. 행간에는 아직 굳지 않은 공기가 떠다닌다. 독자는 그 틈에 손가락을 넣어 모양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차가운 돌을 만지면 손이 베인다. 조각의 글은 독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문장은 칼날처럼 매끈하고, 그 매끈함이 오히려 긴장을 만든다. 한 문장, 한 단어가 정확한 자리에 놓여 있다. 그 자리는 이미 계산되었고, 수정의 여지는 없다. 독자는 감탄하거나 상처 입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소조의 글은 관계를 닮았다. 조금은 어설프고, 불완전하며, 계속해서 손을 대야 유지된다. 조각의 글은 기억을 닮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단단하게 굳혀, 영원한 형태로 남겨두려는 욕망. 하나는 현재형이고, 다른 하나는 완료형이다.



조각의 글은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 번의 망치질이 작품을 망칠 수 있다는 공포. 그래서 더 정확하게, 더 냉정하게 계산한다. 불필요한 형용사를 깎아내고, 과장된 감정을 도려낸다. 남는 것은 뼈대뿐이다. 그 뼈대는 때로 아름답고, 때로 잔혹하다.



소조의 글을 읽을 때 독자는 공모자가 된다. 아직 굳지 않은 세계에 손을 얹고, 함께 형태를 만든다. 조각의 글을 읽을 때 독자는 관객이 된다. 이미 완성된 형체를 둘러보며, 감탄하거나 침묵한다. 하나는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응시다.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흙도 결국 마르면 돌처럼 단단해진다. 돌도 처음에는 흙이었다. 글 역시 처음에는 소조로 시작해 조각으로 끝난다. 초고는 흙이고, 퇴고는 망치다. 문장은 덧붙이고, 다시 깎인다. 결국 남는 것은 덜어낸 자리의 침묵이다.



소조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함이다.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흘러나온 문장들. 그 문장들은 때로 비틀거리고, 때로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리듬이 생긴다. 리듬은 생명이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문장은 숨을 멈춘다. 조금은 거친 문장이 더 오래 숨을 쉰다.



조각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명료함이다. 불필요한 감정의 군살을 제거하고, 핵심만 남긴다. 독자는 그 명료함 속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다. 문장은 정확히 도착한다. 목적지에 곧장 닿는다.

소조는 과정의 미학이고, 조각은 결과의 미학이다. 과정은 흔들리고, 결과는 고정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과정에 더 가깝다. 고정된 순간은 사진처럼 아름답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결국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흙을 쥘 것인가, 돌을 들 것인가. 혹은 흙을 쥔 손으로 돌을 깎을 것인가. 감정의 온기를 남길 것인가, 사유의 날을 세울 것인가.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다. 다만 어떤 문장은 덜어냄으로써 빛나고, 어떤 문장은 덧붙임으로써 살아난다.



행간의 밀도는 재료에서 오지 않는다. 태도에서 온다. 소조의 글이든 조각의 글이든, 결국은 세계를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는가의 문제다. 흙을 오래 만진 손은 감각이 예민해지고, 돌을 오래 깎은 손은 타격의 정확도를 안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 생각한 문장은 스스로 단단해진다.



소조의 글은 흔적을 남긴다. 조각의 글은 흔적을 지운다. 그러나 지워진 자리에도 흔적은 남는다. 독자는 그 미세한 금을 통해 작가의 숨결을 읽는다. 완벽해 보이는 문장 속에도, 사실은 수많은 삭제의 그림자가 있다.

글은 결국 몸의 노동이다. 손목의 통증, 어깨의 뻐근함, 눈의 피로. 소조는 계속해서 손을 적시고, 조각은 계속해서 망치를 든다. 어느 쪽이든 쉬운 길은 아니다. 다만 선택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한 문장이 독자의 마음을 흔들 때, 그것은 소조였을까 조각이었을까. 아마도 둘의 경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덧붙임과 덜어냄이 교차하는 지점.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문장은 생명을 얻는다.



소조의 글은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를 보여준다. 조각의 글은 이미 끝난 세계를 증명한다. 하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답이다. 질문은 계속해서 변하고, 답은 굳어버린다. 그러나 답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질문이 된다. 돌도 결국 바람에 닳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의 문제다. 흙을 쌓아 올릴 것인가, 돌을 깎아낼 것인가. 둘 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하나는 끌어안고, 다른 하나는 도려낸다.



소조의 글과 조각의 글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 지나치게 소조적이면 흐트러지고, 지나치게 조각적이면 차갑다. 온기와 냉기가 균형을 이룰 때, 문장은 비로소 살아 있는 형체가 된다.

소조의 글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변한다. 조각의 글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조금씩 부서진다. 변하는 것과 부서지는 것 사이에서, 문장은 잠시 빛난다. 그 빛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집요하게 쓰게 된다.



글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마르기 전에 형태를 잡아야 하고, 부서지기 전에 윤곽을 남겨야 한다. 소조와 조각 사이를 오가며, 문장은 자신만의 균형을 찾는다. 그리고 그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소조의 글, 조각의 글. 두 얼굴은 하나의 손에서 나온다. 손은 오늘도 흙을 만지고, 돌을 깎는다. 완성은 없다. 다만 계속해서 덧붙이고, 계속해서 덜어낸다. 그 반복 속에서 문장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동시에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 모순이야말로 글의 본질이다. 부드러움 속의 단단함, 단단함 속의 부드러움. 소조와 조각은 결국 하나의 문장을 향해 수렴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살아 있고, 차갑지 않지만 날카로운 문장. 그 문장을 향해.



흙은 손에 묻고 돌은 금을 낸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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