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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ul 19. 2019

나의 고향 익선동에 가면,

브람스와 만나 포트와인을 마신다.



동구 밭 과수원 길에 아카시아 나무가 서 있듯, 안국역에는 항상 파리크라상이 있었다. 내 나이로 기준 잡아도 30년은 족히 넘었다. 이른 아침, 4번 출입구로 걸어내려갈 때 고소한 빵 냄새가 아래에서부터 폴폴폴 올라오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냄새만큼 맛도 일품이었다. 비싼 대로 값을 했다. 마을 주민들에겐 고급 빵집으로 통했다. 이 빵집의 위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안국동 주변엔 빵집이 없었다.

안국역에 오면 종종 이 빵집에 들른다. 엄마가 좋아하는 소시지빵, 동생이 좋아하는 피자빵, 내가 좋아하는 베이글을 속속들이 사서 북적대는 가게를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2번 출구로 올라와 건너편에 보이는 허름한 2층짜리 건물로 향한다.


'브람스' 가게 벽면 한쪽에는 명장들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브람스’라는 가게. 입구에 ‘since 1985’라 적혀 있다. 나보다 세 살 어린 친구다. 점박이 계단을 올라 낡은 문을 제치고 들어가면 그윽한 커피의 잔향이 진동을 한다. 침샘이 고인다. 삐걱삐걱 온 바닥이 나무다. 색이 바랜 자줏빛 소파에 앉아 아이리쉬 라떼를 주문한다. 찻잔에 깊게 배인 커피 자국이 세월을 말해준다. 여 사장님은 빼곡히 들어선 LP, CD장을 뒤로하고 꾸부정히 앉아 이런저런 책을 본다.

“저기 사장님, 브람스 인터메조 될까요...?”

백건우 선생이 연주하는 브람스 인터메조, 카프리치오, 로망스를 들으며 커피에 빵을 적셔 먹는다. 덥수룩한 수염의 브람스가 건반을 훑어내듯, 먹먹한 피아노 소리가 마루에 차분하게 깔린다. 겉에서 보면 뭐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나만의 아지트다.


결혼 전 아내를 데려왔다. 아내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찻길 풍경이 자신과 세상을 갈라놓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제 이 동네에 내가 알던 풍경은 얼마 남지 않았다. 파리크라상마저도 없어진 지금, 나는 이 가게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풍경이 마냥 싫은 것만도 아니다. 익선동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마한 가게 하나. 훤칠한 청년 주인장이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준다. 서울 출장 후 늦은 밤, 이따금 들러 마데이라 산 포트 와인과 두부 샐러드를 주문한다.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어요?" 물어보면 "늘 뭐 하하"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 집에서 하는 거라곤 포트 와인을 마시는 것뿐이다. 19도짜리 마데이라 산 포트 와인에 얹어주는 가벼운 요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음식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섯 잔 정도 남았을 때 면요리를 주문한다. "심심하게 드릴까요?" 하면서 알아서 그때그때 신선한 재료로 뚝딱뚝딱 만들어준다. 주로 '오징어 해물 볶음면'을 먹는다. 후루룩 후루룩하고 있노라면 주인장은 부엌 한구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 천장을 보고 있다. 어쩌다 피곤해 보일 때면 즉석 간식도 서비스로 만들어준다. 말끔히 한 병을 비워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안국역으로 걸어가며 맞는 바람이 좋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1982년. 나는 익선동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훗날 아들을 낳고 난 후, 엄마는 나를 낳기에 앞서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빠도 이후 내가 중간에 세상에 나오지 못할까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난 부모님에게 더없이 소중한 자식이었다. 그리고 4년 후, 나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에게 당신들이 어릴 적 받아보지 못한, 더없이 풍성하 문화예술교육을 선물해주셨다.


리듬 체조하면 나는 신수지, 손연재보다 가수 김완선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익선동 중앙문화센터에서 ‘기분 좋은 날’ 노래에 맞춰 공연했던 꼬꼬마 내 동생이 주인공처럼 따라붙는다. 엄마 아빠는 자식의 ‘국영수’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예체능’ 가르치기에만 집중했다.


내가 맨 처음 배운 교육은 웅변이었다. 교동국교 옆에 학원이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1:1로 매일같이 연설하는 법, 자세 잡는 법, 제스처 취하는 법 등을 코칭해주셨다. 몸에 익을 때쯤, 학원에서는 나를 전국대회에 내보냈다.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간 기억이 난다. 강당 안에 나 같은 아이들과 엄마, 할머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틈 바구니 속에 껴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무대에 서고 마이크 앞에 다가갔다.

“여러~분! 쬐!끔한 꼬마라고 얕!보지 마~십시오!”

첫 대사였다. “이 연사! 외칩니다~~~~~!”. 마지막 대사였다. 중간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등 내용이 많았는데 지금은 처음과 끝만 머릿속에 있다. 수상자를 호명하는데 오랜 시간 내 이름이 나오지 않자, 나는 지겹고 재미도 없어 할머니를 끌고 집에 가자고 대롱대롱 졸랐다.

강당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대상!"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뜨악하고 들어갔다. 내 다리만한 트로피와 함께 수상 기념 녹음 테이프를 받았다. 내 동생은 그 녹음 소리가 재미있다고 몇 년을 반복해서 틀어놓고 따라 했다. (동생은 지금도 나보다 대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웅변과 병행하여, 아빠는 중앙문화센터(지금 익선동 가든타워 옆자리)의 기초 바둑 코스에 나를 보냈다. ‘두 집이면 산다’, ‘땅따먹기 정도다’ 이해하고 나니, 곧 와룡동 사설 바둑학원으로 배움터를 옮겼다. 고씨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 집 거실에는 선생님과 조훈현 9단이 같이 찍은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었다. 책을 보며 기본 정석을 배우고, 친구들과 놀이 바둑도 두었다.

집에서는 아빠와의 대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두었는대도 아빠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너는 남이 어디 두는지 안 봐? 니 돌만 둘 거야?” 하시며 종종 몇 수 물려줬다. 더러 시무룩해져 있으면 술에 취했다며 일부러 져 주시기도 했다.

바둑과 병행하여, 익선동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5년 동안 배웠다. 제일 재미없었다. 선생님이 틀릴 때마다 손가락을 탁탁 쳤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하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꾸역꾸역 다녔다. (훗날 피아노는 내 인생의 큰 바탕이 되었다.)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 합주부 교습은 재미가 넘쳤다. 뭔가 수십 명이 모여서 한 곡을 위해 합심하니 그럴듯한 관현악단의 느낌이 났다. 휴식시간마다 선생님이 켜는 음악이 있었다. 하루는 물끄러미 듣다가 “선생님. 그거 지고이네르바이젠 아니에요?” 묻자,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후 선생님은 나에게 상당히 많은 테크닉과 지식을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바둑, 피아노, 바이올린과 함께 서예를 병행했다. 아빠의 지인 분께서 운영하는 파고다공원 근처 학원이었는데, 내 친구와 그 친구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다녔다. ‘스승님’이라 부르고, 인사는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여 모든 대화는 ‘다나까’로 끝났다. 어린이 작품대회 때, 스승님은 천자문의 한 구절을 내려주셨다.

(척벽비보 촌음시경 : 자만한 구슬이 보배가 아니요, 한치의 시간을 다투라)

미술과외도 받았다. 친구네서 배우기도 하고 선생님 댁으로 가기도 했다. 사실 구체적으로 뭘 배웠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 댓생, 수채화, 유화 그런 것들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그저 친구와 함께 시시덕거리고 선생님과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즐거웠다. 대학생 여 선생님이었는데, 상당히 쾌활하고 아이들 마음도 잘 이해해주셨다.




30년 전, 안국역 주유소 뒤편에는 경제기획원 공무원 연금매장이 있었다. 가격이 저렴했다. 일반인도 이용했다. 엄마는 거기서 생필품을 샀다. 살 것을 찜해놓고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한 후 코너를 돌며 물건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익선동에는 수많은 방문 판매상들이 활약했다. “총각무~~~ 여 배추여!” 소리가 들리면 머지않아 야채파는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엄마는 어김없이 알타리, 대파, 양파, 감자를 한 아름 사 왔다. (나는 지금도 이 분의 성대모사를 똑같이 할 수 있다)

“덴~~~~~~~뿌라!”를 연신 외치는 아줌마가 오면 며칠 먹을 어묵을 샀다. “생선이요~~~~ 생선 생선!” 생선 대야를 이고 다니는 할머니도 있었다. 갈치, 동태, 오징어만큼은 이 분 물건을 샀다.

건어물은 낙원시장의 단골집에서 샀다. 심부름을 가면 아주머니가 내 먹을 간식거리까지 챙겨주곤 했다. 냠냠냠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한 곳. 창덕궁 앞 ‘비원 슈퍼’다.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족히 ‘40년 전통’은 넘는다. 요즘으로 따지면 최신 마트다. 이도 저도 따지기 싫으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와서 여기서 장을 봤다. 나는 늘 이곳에 오면 ‘마일로’(코코아 품명)를 사달라고 조르곤 했다.

우리 집의 모든 화장품은 ‘아모레 아줌마’에게 샀다. 사연이 있다. 추운 겨울날, 빙판 위에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낙원시장 영업소로 돌아가는 아주머니가 딱했던 엄마는 즉석에서 조건 없는 제안을 했다.

“아줌마. 이 빙판길을 혼자서 어떻게 가려고 해요. 만약에 아줌마가 저를 정말 믿으시면 저희 집에 물건 두고 파세요. 돈 일절 안 받을 테니까 마음 놓고 파세요.”

그다음부터 우리 집 툇마루에는 항상 화장품이 가득했다. 아주머니에게는 우리 집이 영업지점 중간 물건 보관소가 되었다. 익선동의 ‘이방인’이었던 엄마는 이 분을 통해 상당한 현지 정보를 익힐 수 있었다.

내게 놀라웠던 사실은, 사립학교인 운현 국교 입학의 계기가 이 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일곱 살이 된 아들의 학교 선정을 두고 고민하던 엄마에게 아주머니가 ‘저 덕성대학교 안에 사립이 하나 있는데 요번에 비원 살다 금호동 간 애가 전학을 안 가고 계속 거기 다니는 거 보면 좋은 곳이 틀림없다. 그리로 보내라.’ 팁을 줬다는 것이다. 한 꼬마의 인생진로가 이렇게 시작점을 밟게 되었다.



최근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해진 운현궁 양관. 이곳의 ‘마지막 주인’은 운현 국민학교 1기생들이었다. 1986년, 이곳은 문화재가 아닌 교실이었다. 여기서 선생과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했다.

지금의 운현 초교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도 아이들은 옛 교실 주변을 기웃대며 놀았다. 어느 날 양관 근처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던 중, 누군가 ‘개구멍을 찾았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수풀 속을 파고들었다.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로 아주 작은 문 하나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리를 풀고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꼬마 서너 무리가 살금살금 집 여기저기를 정탐을 하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구냐?”

갑자기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귀신이다!!!” 빽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도망 나왔다. 그때부터 그 집을 ‘귀신의 집’이라고 불렀다. 학교 안에 귀신이 사는 집이라니. 어린 마음에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귀신의 집’에 드나들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운현궁 집주인' 최후의 목격자였다.

‘개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익선동 방향 쪽 담장에 얼기설기 설치된 철조망 사이로 뛰어내리면 바로 동네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나왔다. 큰 길가로 돌아 나오면 여관 하나가 있었다. ‘문화 여관’. 한자로 쓰인 현판이 달려 있는 그 기와집에 외국인들이 수시로 묵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이 집 마당에 들어가 오늘은 누가 왔는지 기웃기웃거렸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미국인과 외국인 중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따지고 앉아있던 철딱서니 없는 어린 녀석들이었다. 노랑머리 사람만 보면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 사람들도 꼬마들이 귀여웠는지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자신들의 아이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익선동 최초의, 그리고 유일무이했던 게스트하우스였다.

어린애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여관이 있었다. ‘운당 여관’이었다. 여관이라고 하기에는 무지하게 큰 궁궐 같은 곳이었다. 담장 안에 집이 수십 채는 있어 보였다. ‘뚱따당 뚱땅’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집주인을 ‘박 선생님’이라 불렀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보유자 고 박귀희 씨였다.) 여관 입구 안쪽에는 수위 아저씨가 지키고 있어서 가까이만 가도 ”떽!” 하고 뭐라 뭐라 해서 ‘메롱’ 아저씨만 놀리고 도망가버렸다.

아빠에게 “저 집은 뭐 하는 집이에요?” 물었더니 아빠는 “어른들 다니는 집이지” 해서, “무슨 어른들?” 다시 물으니 잠시 보던 책을 접고서 말했다. “바둑 두는 어른들이 다니지.” 그때 아빠가 쥐고 있던 책 표지에는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조치훈 9단의 책이었다.

탑골공원이 파고다공원이었던 시절, 아빠는 휴일이면 나를 데리고 파고다공원을 거쳐 종묘길 산책을 했다. 관철동, 낙원동에서부터 세운상가까지 이어지는 길은 그야말로 바둑판 길이었다. 너도 나도 흑돌 백돌을 쥐고서 심각하게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돌을 둘 자리를 고르고 있었다. 양복 차림의 말끔한 남성들이 벤치의자며, 돌판이며 앉아 생각 전쟁을 했다. 훈수꾼들은 혼이 났다.

운당 여관에서 대국이 벌어진다 하면 동네 일대가 북적북적했다. 촬영 차량, 카메라 찍는 사람들, 구경꾼들 할 것 없이 모두 익선동 사거리에 죽 치고 있었다. 그땐 그들이 조훈현인지, 이창호였는지 알 턱이 없었다. 바둑을 어느 정도 배우고 나서 그곳이 바둑 메카의 성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운당 여관은 내가 열 살쯤 해서 없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지나 그곳에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겉으로만 보면 다를 바 없는 현대식 건물이지만, 내부에는 서예협회, 바둑협회, 시인협회, 문인협회, 국악인협회 등 각종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생겨났다. 그리고, 주민들이 가장 환호했던 곳, 익선동 최초의 ‘최신식’ 사우나가 지어졌다.



익선동에는 세 개의 문방구가 있었다. 첫째 문방구, 둘째 문방구, 셋째 문방구. 문방구 이름은 있었지만 우리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저 학교에서 가까운 순으로 그렇게 불렀다.

세 문방구는 교동국교와 낙원상가 길 사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땐 재동/교동 국민학교에 한 학년에 열몇 개 반이 있었고 반마다 애들이 50명씩 있을 때라(운현 국교는 제외 : 전교생 180명) 세 곳의 문방구가 그럭저럭 먹고살만했던 것 같다.

각 문방구는 규모도 달랐고 생존 방식도 달랐다. 첫째 문방구가 제일 작았다.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가 운영했는데 학생들에게 참 친절했고, 무엇보다 학교 숙제에 필요한 기초 교구들이 대부분 다 있었다. 그래서 탐구생활이니 과학실험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죄다 그 집에서 샀다.


대신 이른 저녁에 문을 닫기 때문에 미리미리 필요한 리스트를 기억해 두었다가 하굣길에 들러 사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도 애가 있어서 빨리 문 닫고 가야 했던 것 같다.


둘째 문방구가 가장 컸다. 덩치 큰 젊은 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항상 호쾌한 얼굴로 애들을 맞았다. 다만 덤벙대는 게 문제였다. “그래 뭐 줄까?” / “곤충 채집통 주세요” 하면 “어 그거! 어 그게 어딨었더라...”하며 여기저기 한참을 뒤져 찾아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제일 인기가 많았다. 왜냐면 장난감으로 승부를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큰 로봇, 자동차, 뽑기, 미니 오락기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애들 홀리는 최신 물건들은 죄다 갖다 놓고 팔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반다이사에서 직구(?)한 드래곤볼 카드 머신이 있었다. 백 원을 넣고 돌리면 한 장 씩 카드가 나오는데 아 그 기계 돌리는 맛이란. 대부분 전투력 낮고 별 볼 일 없는 애들이 나오긴 하다만 계속 100원짜리 넣고 넣다 보면 간혹 손오공, 베지터, 프리더, 기뉴 특전대 같은 거물급이 터지면 주변에서도 아이들이 "우와"하고 같이 축하해주었다. 거기에 만약 프리즘 슈퍼카드라도 나오는 날은 애들에게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주기도 했다.


셋째 문방구가 제일 싫었다. 적당한 규모에 적당한 물건이 모여 있는 곳인데, 할머니가 무척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애들이 간식거리를 살까 말까 만지작대기라도 하면 “살 거면 사고 안 살 거면 나가 있어!” 꽥 소리를 질렀다. 애들은 툴툴대며 밖에 나가 미니 오락기나 두드리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불친절 악마 할머니’는 정말 보기 싫었지만 그곳이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여는 터라, 잊어버리고 있던 준비물이 번뜩 생각나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럼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뭐 줄까?” 상냥하게 원하는 물건을 탁탁 갖다 줬다.


셋째 문방구부터 없어졌다. 아마 주인장이 쇠약해지셔서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둘째 문방구도 없어졌다. 장난감을 사러, 교구를 사러 오는 아이들이 점점 사라진 까닭이다. 그 자리에는 고급 일식집이 들어섰다. 


첫째 문방구가 가장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트 세상이 오면서 그 명맥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낙원떡집’이 들어왔다. 그래도 떡집 하면 ‘원조 낙원’ 브랜드가 좋은지 그건 지금까지도 장사하고 있다.


'낙원떡집 떡이 맛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익선동에서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큰길 사거리 모퉁이 집 떡 맛이 꽤 괜찮았던 것 같다. 글쎄, 왜 그 집만 갔을까 떠올려보니 엄마가 그 집만 갔다. 심부름도 그랬고.

그땐 떡집이 왜 그렇게 많았을까. 떡집 옆엔 아귀탕집이 왜 줄줄이 늘어서 있고, 안쪽으로는 수선집이며 한복집은 왜 그리 많았는지, 낙원상가 악기가 왜 그리 유명한지, 올 것 같지도 않은 동네 깊숙한 곳에 여관 모텔은 징글징글하게 다닥다닥 자리했는지, 이것들을 테이블 위에 한 데 묶어놓고 중심을 두고 보면 전체 그림이 보인다.

요정


90년대까지도 기와 담장 너머에서 마이크 노랫소리와 함께 풍악이 울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본 요정은 2개인데 엄마 말로는 현재 트레비앙 아파트 쪽에도 요정이 하나 더 있었다고 했다. 1970-80년대, 그 작은 동네에 궁궐 같은 기와집이 최소 세 곳이 있었다는 거다.

호황을 누리고 흥의 소비가 넘쳐나던 시절, 음-주-가-무의 하모니를 구성하는 맛 좋고 모양 예쁜  떡이며, 춤사위를 펼쳐 보이는 옷차림이며, 풍을 일으키는 악사며, 뒤풀이 속 푸는 매콤한 아귀찜이며, 푹 자고 가는 여관들이며, 그것들이 옆에 함께 했던 건 아주 자연스럽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단정 짓진 않겠다. 요정이 없어진 이후 남은 떡집은 원조와 매체를 겨냥한 맛집으로 변신. 한복집은 한류 의상 대여 전문숍으로 변신. 낙원 악기상가는 왕년의 한가락을 보여주는 전국구 고수들의 공간으로 변신. 여관은 작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요정 이야기는 '성'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장벽에 갇혀 감히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기 어렵다. 무 자르듯 그것만 도려내고 그 자리에 신문화 슬로건을 붙여 다시 주변을 재편성한 후 콘텐츠라는 이름의 것으로 정제시킨 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익선동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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