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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ul 13. 2019

명랑소녀 엄마의 '기이한' 서울살이

고향을 떠나 익선동에 정착하기까지



언젠가 아내가 서울집 제사 때 우리 엄마 살던 두테비 마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의 본관을 여쭤보니 ○○김씨라 하여 “○○김씨 양반 마을이었나 보네요” 하니 우리 엄마 왈,


“에이~~ 옛날에 다 족보 사고 그랬겠지.”


그 이야기를 듣고 빵 터져서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럴 법도 한 것이, 엄마는 어디 가서 '예의 없다'거나 '격 떨어진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당신 처신이라든지 자식 교육에서만큼은 굉장히 엄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양반 집안 몇 대 손이요’ 가르치는 우리 아빠도 항상 못 마땅해했다. 


“강씨종자 뭐 하나 반듯하게 살아온 것도 없는데 무슨 양반이 어쩌고. 아유 참나.” 


확실히 양가는 차이가 있었다. 강가에는 이상주의자 또는 망상주의자들이 꽤 있었다. 과감하고 무모했다. 호시절에야 호인이라 불렸겠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했다가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라. 실속이 부족했다.


김가는 지키기, 굳히기에 능했다. 아쉬운 소리 듣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엄마는 대인관계에서 가혹하리만큼 호혜성을 따졌다. 원칙을 지키는 자에게는 존경과 예를 표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와는 최소한의 관계만을 남겨두고 교류하지 않았다.


역동치는 근현대기, 익선동 외고모 할머니가 동대문 일대의 ‘큰 손’으로 활동한 점이나, 고모부 할아버지가 경기 중북부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버스 노선을 운영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김가는 조선 후기 보유한 농지를 바탕으로 사대문을 드나들며 이문을 남기고 파발 일대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세력을 확장한 중인 계급이 아니었나 싶다. 단적인 예로, 내가 큰 장난을 칠 판이면 외할머니나 고모할머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아서, 경쳐!!!"
“할머니! 경치는 게 뭐예요?”
“혼나는 거지! 큰일나 하지마!”


사실 ‘경을 친다’는 말은 실제로 경을 치는데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시대에 종이나 쇠북을 쳐서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데, 밤이 되면 일경, 이경 이런 식으로 5경으로 나누어 통금과 해제 시간을 알린다. 우리가 요즘 말로 ‘어디서 몇 시경에 보지 뭐~’ 하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통금 위반자인데, 이들은 경범죄자로 취급되어 호패를 압수당했다.


그렇다고 딱히 곤장을 맞을 정도의 형벌감은 아닌지라, 순포막의 포졸들은 자신이 불침번을 서는 동안 걸린 자들에게 대신 경을 치도록 하는 벌을 주고 날이 밝으면 훈방 조치해줬다. 그렇게 벌을 서고 돌아온 ‘불순한’ 자들로 인해 마을에서는 ‘저 경을 칠 놈’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매사 부딪히지 않고 최대한 융통성 있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엄마의 습성은 이러한 김가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퇴직하신 운현초교 모 교장 선생님 말에 따르면,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사람들 중에 유독 우리 엄마만이 교무실까지 찾아와서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고 갔다 한다. 그리고 며칠 후 어느 학부모가 입학 취소를 신청하여 공석이 생긴 찰나, 선생님은 그때 펑펑 우신 어머니 생각이 나 우리 집에 전화를 거니 엄마가 번개같이 달려와서는 입학 등록을 하더라는 것이다. 찌를 담그려면 한 줌의 눈물도 마다하지 않는 쨍쨍한 엄마의 캐릭터는 지금도 여전하다.




엄마는 1952년 고양시 성석리(지금의 성석동) 두테비 마을 김씨집안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태어난 엄마는 피난길 속에서도 할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전쟁 중 피격으로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평생 홀어머니 밑에서 오빠와 함께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식으로서 내가 지켜본 바, 엄마는 아버지의 부재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의 그늘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오히려 명랑하고, 당차고, 자존심 강한 신여성의 면모가 넘쳐났다. 이러한 엄마의 성격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외할머니의 정성어린 뒷받침과 유복했던 가정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버지의 성장과정과는 달리, 엄마는 먹고사는데 딱히 불편이 없는 정도의 비교적 유복한 생활환경 속에서 컸다. 논과 밭이 제법 있었고, 집에 '머슴방'을 놓고 농사를 크게 지었다. 나 어릴 적, 외갓집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죄다 김씨집이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그 마을은 확실히 김씨 집성촌이 맞았다.


엄마는 학창시절 반에서 오락부장을 맡았던 것을 늘 당신의 자부심으로 꼽았다. 교실 분위기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위트 있는 엄마의 농담에 친구들과 선생님이 모두 넘어갔다고 했다. 덕분에 주변에는 친구가 끊이지 않았고, 선생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 나아갔다.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결혼에 매달리는 주변 친구들과는 달리 학원 강사 생활과 과외 활동을 병행하며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엄마 나이 서른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명랑했다. 장난을 몹시 좋아했다. 좋은 말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나쁜 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은 학교 건물 귀퉁이에 사는 달팽이 수십 마리를 잡아와서는 집 장독대에 모조리 풀어놨다. 아마 움직이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꿈틀이 세상의 대참사를 확인한 엄마는 눈에 불꽃을 번쩍이며 회초리를 들고 번개처럼 달려왔다. 나는 늘 그랬듯 생쥐처럼 찍찍찍 할머니 방으로 도망쳐서는 할머니 등 뒤에 쏙 숨었다. 그러면 백발이 성한 할머니는 “얘가 때릴 데가 어딨냐. 니가 좀 참아라” 하고, 엄마는 “고모가 자꾸 감싸니까 애가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씩씩하며 방을 휙 나가버렸다. 엄마가 잠잠해지면 나는 “할머니 고마워요” 큭큭대고, 할머니는 “에이구 싱겁기는” 하고 웃어버렸다.


내가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는 대여섯살의 나이가 되었을 즈음, 할머니는 70대 후반의 나이로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나는 언제나 또렷하게 알아보셨다. 과자 먹고 싶다면 커다란 나전 장롱에서 뒤적뒤적 용돈을 꺼내 쥐어주셨다. 나는 부리나케 슈퍼에 가서 먹고 싶은 간식거리를 사 와서는 나 한 입, 할머니 한 입 하며 건넌방에서 그렇게 지냈다. 졸리다 소리하면 할머니는 두꺼운 요를 깔아주시고서는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곁에서 토닥토닥 재워주셨다. 익선동 할머니는 내 소싯적 최후의 방어막이었다.




내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 언젠가 엄마에게 '그땐 왜 그렇게 무섭게 나한테 그랬냐' 물었더니 엄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의외의 답변을 했다.


할머니 모시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익선동 할머니는 유독 엄마를 좋아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너는 두테비 나와야 잘 산다” 하며 계속 엄마의 상경을 권했다. 일산 상고를 졸업하고 고려은단(당시 경동시장에 위치)에 취직하면서, 엄마는 익선동 고모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엄마 외에도 김씨 집안의 많은 젊은이들이 고모집을 통해 서울 정착을 시도했다. 장사하려는 사람, 공부하려는 사람, 서울구경하려는 사람, 뭐 하나 가릴 것 없이 너나나나 횡재다 하고 익선동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고모의 불같은 성격에 모두들 벌벌 떨며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오직, ‘똑순이’ 엄마만 고모를 견뎌냈다.


엄마가 늘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가 ‘ㅇㅇ은행 가서 돈을 뽑아와야 하는데 동전 바꿔올게 많으니 같이 가자’ 하여 엄마는 동전 챙길 가방을 들고 삼환빌딩으로 향했다. 엄마가 창구에 가서 돈의 일부를 동전으로 달라고 하자, 담당 직원이 귀찮은 듯 500원짜리 뭉터기를 퉁명스럽게 던지듯이 주다가 그중 하나가 비닐이 찢어져 동전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져 버린 것이다. 대기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불같이 달려와서는 올려놓은 동전을 전부다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30년 단골인데 이딴 식으로 사람을 개취급해! 지점장 당장 나와!”


‘할머니 전성시대’를 엄마는 그 일화로 압축하여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익선동 사람들과 섞이는 걸 몹시도 싫어했다고 한다. 동네친구라고는 '만신 할머니'와 ‘곱게 늙으신 여관 뒷집 꼬부랑 할머니’(엄마의 표현이다) 이렇게 두 분이 전부였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익선동 집을 떠날 때, 할머니는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할머니가 심장판막에 이상증세가 생기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병원에서는 “지금 5초 내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소견을 줬다. 미국의 외동아들이 돌아왔다. 의사인 아들도 할머니를 데려가려 했지만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결국 두테비 마을에 SOS를 쳤다. 할머니는 혼자 살다 죽겠다고 버티다가 계속되는 아들의 설득에 조건을 하나 달았다.

“영희 아니면 난 싫다.”

이렇게 하여 엄마아빠는 할머니 임종까지 임시로 보살펴 드리기로 하고 익선동 집으로 들어왔다. 병원의 소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13년을 더 사셨다. 생각해보건대, 아빠의 입장에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교차했을 것 같다. 마침 서울로 진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큰돈' 들이지 않고 사대문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점은 큰 이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허나, 당신의 어머니(나에게는 할머니)를 장남이 모시고 살 수 없게 점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을 테다. (이때부터 친할머니는 둘째 삼촌이 평생 모셨다.) 그러나 집안을 일으킬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당시 아빠의 입장은 충분히 헤아릴만하다.


엄마는 고난길의 시작이었다. 호랑이 같은 고모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도 아니거니와, 집에 붙어 병수발을 드는 것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모에게 치매가 발병하면서 엄마는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받으며 십여 년의 세월을 견뎠다. 이렇게 엄마아빠는 '본의 아니게' 익선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 나이 열 살, 할머니 임종이 다가왔다. 엄마는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는 고모의 곁에서 하루 종일 팔다리를 주무르며 “고모 극락왕생하세요. 극락왕생하세요. 이생에 힘든 일 다 잊고 극락 가서 행복하게 사세요. 고모는 할 만큼 다했어요. 극락왕생하세요” 고개를 파묻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아침에 깼을 때 할머니는 숨을 쉬지 않았다. 엄마는 대성통곡했다.

엄마가 훗날 속내를 털어놓기까지, 그동안 나는 지금껏 엄마가 할머니 모시는 게 힘들었던 이유가 단순히 '노인네 수발'의 어려움인 줄 알았다. 실은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주었던 든든한 고모가 심장병으로 드러눕고, 치매를 앓다가 숨을 거두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것이다.


내 나이 스물의 여름, 이상한 꿈을 꿨다. 하얀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듯 정신없이 화면이 요동치더니 익선동 집 건넌방에 누워계신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가 갑자기 내 오른손을 움켜쥐셨는데 어찌나 힘이 세던지 뻐근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나를 빤히 바라보시며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어. 조심해라." 하시고는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지셨다. 나는 잠에서 깨어 엄마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는 개꿈이니 잊으라고 했다.


그로부터 약 반년 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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