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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23. 2019

멸망하는 출판사, 무너지는 우리집

책장사에서 갈비장사로



총각시절의 언젠가.


집에서 오랜만에 쉬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해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니 저명한 한국의 모 철학자가 나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논어에 대해 이것저것 강연하는데 무슨 얘기하나 보자 하고 철퍼덕 바닥에 누워 보고 있자니 아빠가 와서 옆에 앉는다. 좀 듣고 있으려니까 아빠가 묻는다.

“넌 저 사람처럼 되고 싶냐?”
“되겠어요? 학위만 대여섯 개는 가진 사람인데.”
“그게 대단해 보이냐?”
“대단하죠.”
“그럼 행복해 보이냐?”
“행복해 보이는데요?”
“본인은 그럴 수도 있겠지.”

분명 저 학자는 행복해 보인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가며 칠판을 탕탕 두드리고, 밑줄 긋고, 크게 한번 동그라미 둘러치고, 침 튀기고, 사람들은 그걸 맞고, 아...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문화가 경제로 갔다가 역사로 이어지고 이게 또 언어와 연결되고, 알고 보니 민족 간의 차이는 이런 것이고. 신났다 신났어. 정말 신이 내린 것처럼 말로 춤을 춘다. 아이고 이 양반 참 많이도 안다. 저걸 언제 다 외웠을까? 아니 외워지나? 그냥 이해하는 건가? 천재들은 원래 그런 건가?

“저 사람 저기까지 가는 동안 가족들은 어땠을까?”
“글쎄 뭐... 별로 신경 안 썼겠죠.”
“자기만 잘난 거야. 자기만 있는 거라고. 봐라 저 사람. 그럼 결혼을 하지 말던지. 저 가족은 행복할까? 저 사람 나가서 저러고 있는 동안 가족들은 어땠겠냐? 뭐든지 너무 파고들면 안 돼. 적당히. 보통사람으로 살면 되는 거야.”

순간 울컥했다. 다 망한 우리 집은 보통 집인가? 번번한 집 하나 없이 남들 벽면 티브이 보는 시대에 툭툭쳐야 화면 잡히는 박스 티브이 하나 너덜너덜한 옷장 위에 덜렁 올려놓고 이런 사치의 대화를 부리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 집은 행복한 건가?

“그래서 우린 지금 보통 사람으로 살아요? 보통 사람이 뭔데요 그럼?”

짜증이 나서 누워있다 벌떡 앉아 질러 버렸다.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래도 우린 가족이 있잖아. 화목하잖아.”
“화목해도 돈이 없고 가난한 건 불행한 거예요. 평생 가난하게 살다 죽어도 보통은 아닌 거죠.”

손가락 사이에 꾹 쥐고 있던 칼날 같은 말침을 싸늘하게 던졌다. 아빠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그래. 불행하지. 그래도 가족이 우선인 거야. 지금은 이해가 안 가도 나중에 네가 애 낳고 키워보면 그땐 알 거야.”




아빠에게 출판사에 대해 물으면, 아빠는 대개 단답식의 짧은 답변일 뿐 당신 속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말해줄게.” 이 한 마디뿐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30-40대 아빠의 삶은 내가 보고 느낀 것, 또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자주 아빠 회사에 놀러 갔다.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종종 교보문고에 들러 책 구경을 했다. 주로 세계여행 코너에 갔는데, 내가 뚫어지게 보는 책이 있으면 아빠는 가격을 불문하고 내 손에 꼭 들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빠가 회사에 놀러 온 나를 데리고서 퇴근길에 집으로 가지 않고 낙원상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포장마차였다. ‘여길 왜 왔나’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아빠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소주 몇 잔을 드시더니,

“너 홍합 먹어본 적 없지? 한번 먹어봐. 정말 맛있는 거야. 이거 맛없으면 아빠가 장난감 사줄게!”

이렇게 달콤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먹자마자 무조건 맛이 없다고 했다.(당시 나는 장난감 중독 말기였다.) 아빠는 찡그리는 내 얼굴을 보고 하하하 크게 웃더니 또 말없이 남은 소주를 비우고서는 근처 문방구에 가서 제일 큰 로봇 장난감을 사주셨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너무나 들뜬 마음에 칼바람이 아주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의 전성시대’는 15년을 채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나이 열 살 때. 한 차례 부도위기를 왔다. 자산을 팔고, 적금을 깨고,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급한 불을 껐다. 아빠의 회사는 규모를 줄이고 광화문에서 사직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국민학교 4학년의 어느 날. 적막이 감도는 저녁상 앞, 엄마도, 아빠도 수저를 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아빠는 천장을 올려봤다. 아빠의 왼쪽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빠는 말없이 소주만 드셨다.


올해 여름이 되어서야 아빠에게 실패의 원인을 들을 수 있었다. 첫째는 PC사회를 경시한 탓, 둘째는 너무 독단적으로 회사를 운영한 탓이라고 했다. 첫째 이유는 썩 와 닿지 않는다. 당시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PC를 통해 책을 보급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둘째로 꼽는 원인이 더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본다. 팔팔했던 그 시절, 아빠는 강건했고, 부러지지 않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상대방의 조언을 잘 듣지 않았다고 했다. 이 부분을 당신께서는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미 한 사람이 끌고 가는 '영웅 시대'는 끝이 났는데 혼자만 그 속에 갇혀 있다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떠나보냈단다. 

엄마가 꼽는 실패의 원인은 보다 현실적이다. 형제들 챙기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황으로 이어진 게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친할머니는 상대적으로 자립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한 아들을 안타까워했고, 아빠에게 동생 좀 도와주라 간곡했다고 했다. 아빠는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쏟아 부었다. 아빠 뿐만 아니라 주변의 형제들도 그 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고 했다. 거기서 발생한 손실로 인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재정파탄의 상황으로 추락한 것이 주된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엄마는 회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선동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아들의 소유인 그 집은 곧 팔렸다. 우리는 익선동 살림을 정리하고 계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것이 서울을 떠날 준비 단계라는 걸 나는 뒤늦게서야 알았다. 외할머니가 상경하여 1년 간 우리 남매를 돌봐주셨다. 엄마 아빠를 주말에만 보는 날이 늘어났다. 그것이 곧 내 인생 최악의 ‘원미동 3년’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63-1.


부천-서울 간을 오가는 좌석버스였다. 네 살 밑 여동생을 데리고 열세 살 아이는 하루 왕복 세 시간 반을 그렇게 오고 갔다. 부천 집, 아니 집이 아니지 부천 가게 전화번호는 잊어버렸는데 그 버스 번호는 지금까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 버스를 타고 정시 통학을 하려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늦게 나오면 얼추 두 시간을 서울까지 서서 가야 한다. 비몽사몽 시리얼에 우유 부어먹고 후딱 씻고 옷 입고서는 집 앞으로 나가 시내버스를 탄다. 춘의사거리에 내려 서둘러 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린다. 서둘러 뒷좌석으로 들어가 동생을 창가 쪽에 밀어 넣는다. 다섯 정거장쯤 지나면 벌써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다닥다닥 붙어서는 천장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왜 63-1이란 번호일까. 당연히 노선에 따라붙은 번호겠지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63에서 1을 빼면 62이니까 앞으로 62개월을 이렇게 보내면 그땐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63 하고도 1이니까 64개월인가? 그냥 63번이라는 녀석 옆에 1이라는 숫자로 빌붙어 이 길을 언제까지고 반복하는 것인가? 혹시 예순여섯 번의 저주를 받아야 이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잠시나마 부유하게 산 삶에 대해 육십삼번을 속죄해야 끝낼 수 있는 것인가?

 

잿빛 하늘의 칙칙한 거리. 온 주변이 다 공장이다. 먼지 한가득 먹금은 가로수길 도로로 시멘트 차량이 줄을 지어 돌진하면 팔로 눈과 코를 막는다. 횡단보도를 건너 검붉은 벽돌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간다.

학교가 끝나면 갈빗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도착하면 가게에 딸린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서빙을 한다. 숯불도 굽는다. 가끔 손님이 원하면 갈비도 구워준다. 맥주컵과 소주컵은 수시로 닦는다. 마늘과 쌈장도 종지 그릇에 담아둔다. 간혹 쥐가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죽을 때가 있어 홀과 카운터, 좌식 자리 곳곳을 살펴본다. 더러는 밤늦게까지 먹다가 계산 않고 도망가는 아저씨들이 있어 나가는 입구 쪽을 지키기도 한다. 설거지를 하고 대걸레질을 한다.

밤이 되면 동생과 나는 각자 배달을 떠난다. 나는 주변 공장을 돈다. 야식 시간이다. 그때도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들이 꽤 많았다. 주로 중앙아시아권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말도 잘했고 친절해서 좋았다. 컴컴한 골목길 사이 가로등에 의지한 채 그렇게 회색 담장의, 회색 건물의, 회색빛 잠바를 입은 사람들에게 줄줄이 밥을 갖다 주고 장부에 기록했다. 여동생은 식당 주변의 노래방, 당구장, 문방구, 이런저런 가게들을 주로 돈다. 선천적으로 당찬 아이였다. 야물차게 음식 들고 가서는 따박따박 돈을 받아와 엄마를 주고, 그중 일부는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그때 동생 나이 아홉 살이었다.

주말이 되면 더 바빠졌다. 공장은 휴일이 없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근의 수백 명 직원들이 식당에 와 식사를 했다. 혹여라도 꾸물거리면 부모님에게 된통 혼나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학대라던지 핍박이라던지 그렇게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에겐 사람을 고용해서 쓸 여유가 없었다.

팔고 남은 갈비를 먹었다. 옷에는 항상 고기 냄새가 배었다. 학교에서 짓궂은 친구 하나가 별명을 지어줬다. 정육점 씨. 지금도 그 고기 냄새는 코 끝에 굳은살처럼 박혀 빠지지 않는다. 난 지금도 갈비를 사 먹지 않는다.

중학교 입학 때, 배치고사라는 걸 봤다. 무슨 인적성 검사인가 했더니 말 그대로 시험 점수별로 애들을 반에 배치하는 작업이었다. 꼴에 사립학교 다녔다고 성적이 제법 높았다. 고득점자들은 선생님들이 주기적으로 불러 관리했다. 그러나 난 곧 그 ‘엘리트’ 무리에서 이탈했다. 공부할 시간도,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학교-갈비-학교-갈비-학교-갈비-학교-갈비의 뫼비우스 띠 안에서 맴도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적은 2년 사이 곤두박질쳤다. 서울의 동네 친구들은 아예 만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갈비를 굽고 치우는 것 밖에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새빨간 숯덩어리들을 볼 때면 내 갈비뼈를 오목조목 부러뜨려 다 구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밤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비틀즈를 들었다.

간혹 물건을 떼 오지 않아도 되는 날, 배달 봉고차로 아빠는 동생과 나를 학교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항상 앞좌석에 앉아 대여섯 개의 클래식 카세트를 반복해서 돌려가며 들었다. 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비발디 사계, 차이코프스키, 베토벤을 들었다. 익선동 살 때 부모님과 함께 레코드 가게에 가서 샀던 음반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미켈란젤리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협 13번과 15번이었다. 희망과 열정에 가득 찬, 내일은 뭔가 다를 것 같은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희망고문’이었지만 '감상의 시간'만큼은 그래도 행복했다.


청운중학교 등굣길에 서는 차들은 대부분 고급 승용차들이었다. 번쩍번쩍한 검은색 차에서 아이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쾅' 문 닫고 내리는 모습에 나는 지레 겁을 먹어버렸다. 우리 차가 창피했다. 그래서 항상 학교에서 최소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려 달라 아빠에게 이야기했다.

하루는 등굣길에 깊은 잠에 들어 아빠가 흔들어 깨워 일어나 보니 벌써 학교 입구까지 와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내릴 준비를 하려는데, 저 앞에 같은 반 친구가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내려서 인사를 하려는 찰나, 친구가 휙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버렸다. 차에서는 비발디 사계의 겨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친구는 이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사계를 듣지 않았다.

가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져 갔다. 아무리 동분서주해도 낼 수 있는 수익은 한계에 다다랐다. 인근 공장 직원들이 팔아주는 점심 식사로 근근이 버텼다. 엄마는 부동산 업자에게 속았다고 했다. 주변 아파트 상권이 좋아 사람이 많을 거라고. 그 아파트는 임대 아파트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주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속은 게 아니라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의 시장 기초 조사도 하지 않고 덤벼든 장사는 당연히 마이너스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우리 가족은 거의 모든 돈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에게 물었다. 서울 가고 싶냐고. 나는 울면서 말했다.


다시는 여기서 살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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