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냐면 요즘 부쩍 뜨고 있는 청와대 옆 ‘삼청동’이라 통칭하여 부르는 그 동네 중 하나이다. 지금이야 가정집이고 세탁소고 뭐고 다 들어내어 뜯어고쳐서 홍대마냥 그럴듯하게 꾸며두어 제법 볼거리들이 있지만, 23년 전 삼청동의 모습은 70-80년대의 달동네를 연상케 하는 그야말로 잿빛 동네였다.
감사원이 위치하고 있는 삼청동 꼭대기 주변의 부촌 일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구역은 오래된 도시형 기와집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옥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옛 조선의 대궐집들을 쪼개고 나누어 만든 것인데, 요새로 말하면 아파트 분양식으로 팔아치운 것들이다. 인간 나이로 치면 족히 70-80세가 된다. 너덜너덜한 옷을 기워입고, 꿰매고, 덧붙여 입은 꼴을 상상하여 집에 대입시켜보면 대략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청와대 길에서 바라본 오늘날 ‘북촌한옥마을’이라 불리는 곳의 경관은 꼭 전쟁 통에 폭격 맞은 폐허 그 자체였다.
팔판 정육점 사거리 위치한 목재로 만든 2층 집. 2층에 세를 주고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의 경사가 족히 60도는 되어 보였다. 어찌나 가파른지 자칫 발 한 번만 잘못 디뎌도 바로 병원행이겠다는 생각에 가족 모두 조심조심 기어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집은 마치야 형식(1층 가게, 2층 숙박시설)의 일제 적산가옥이었다.
그 집은 우리가 가진 3-4천만의 전 재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 동네의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름엔 뜨거운 열에 살이 익고, 겨울 아침엔 입김이 나올 정도의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열악하고 어두운 보금자리로 숨어들었다.
그 보금자리마저 뚫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 아버지 회사 다니던 직원들이 보낸 '떼인 돈 받아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지급받지 못했던 수개월 월급을 달라고 매일같이 찾아와 독촉했다. 엄마는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도록 이불 덮고 누워 있으라 했다. 나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시킨대로 해서 딱히 나쁠 것도 없어서 동생과 함께 골방 끝에 파묻혀 눈 시퍼렇게 뜨고 덤비는 아저씨들을 마주했다.
내 나이 열아홉, 고3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옆 집에 불이 났고, 순식간에 우리 집에 옮겨 붙었다. 1층은 불타올라 나갈 수가 없었다. 가족 모두 내 방 창문을 통해 옆 집 지붕으로 넘어갔다. 목재 가옥은 3분도 되지 않아 잿더미로 변했다. 주변 주택 3채가 탔다.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는 뒷수습 정도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졸지에 실오라기 옷 하나만 남기고 모든 살림살이를 잃었다. 나는 아무것도 슬프지 않았다. 불이 나서 집이 없어진 그 정도로는 이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 한 달 동안을 친구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부모님은 친척집에 몸을 의탁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부모님은 더 쪼그라든 집 자금을 갖고 삼청동 일대의 살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딱 하나 집이 있었다. 지하집이었다. 벽 상단에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정도의 아주 작은 창이 있었다. 교도소를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은 기꺼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곳에도 이력서를 낼 처지가 못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회사 택시를 몰았다. 엄마는 식당일을 하며 수입을 냈다. 재정 총괄은 엄마가 맡았다. 다만, 은행업무만큼은 내가 했다. 엄마는 그간의 트라우마로 인해 ‘은행 울렁증’이 걸려 은행 출입을 극히 꺼려했다.
집 앞에 상업은행이 있었다. ‘이건 여기로 보내고 저건 이리로 입금하고 요건 찾아와’ 엄마가 시킨 대로 그곳에 가서 입금증, 타행환 등 서류를 적어 창구로 가져갔다. 이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다 보니 집안 형편을 뼈 시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엄마 통장 도장 들고 다니는 게 귀찮아 내 통장을 만들었다. 그때 함께 입출금 카드를 만들었다. 금색 테두리 안에 무슨 레고 모형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려 웃고 있는 그림이 들어있는 우스꽝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얼마 지나 뉴스에서 합병 어쩌고 이야기가 돌더니 은행 간판이 한빛은행으로 바뀌었다. 창구에 가서 카드를 바꿔야 하냐고 물었더니 상관없다고 해서 그대로 썼다. 대학생이 되자 이번에도 합병설이 돌더니 또 간판이 바뀌었다. 우리은행. 이러다 은행 망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도 에이 망해봐야 나 같은 사람 무슨 피해있겠냐 하며 거래는 계속했다.
난 우리은행 삼청점에서 대학교, 대학원 학자금을 모두 빌렸다. 학사 때 수석은 아니어도 학년 장학금을 제법 받았고 알바도 열심히 해서 빚을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원은 사정이 달랐다. 성적장학금이 학기당 꼴랑 70만 원이었다. 4학기 동안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학석사 모두 합쳐보니 순수 학자 대출금만 족히 2,500만 원, 생활비 대출까지 합치니 내 빚은 3,500만을 넘어섰다.
이자만 갚기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회사와 대학원을 병행(다행히 원생 중에 직장인들이 대다수라 교수님들이 수업을 밤에 해주셨다)했다. 버는 족족 이자로 쏙쏙 빠져나갔다. 내 카드도 바쁘게 ATM기를 출입했다. 그래도 마그네틱 고장 한번 없이 잘 기능했다.
대출금 원금 상환기간이 도래하자 한 달에 80만 원 꼴로 갚아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나는 회사, 대학원 학술조사, 연구소 프로젝트, 아카이브, 전단지, 소일거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밤낮 평일 주말이 없었다. 발생하는 수익은 모두 우리은행 삼청점으로 넣었다. 수천번을 긁고 긁었지만 카드는 여전히 제 기능을 했다.
은행 옆에는 월전미술관이 붙어 있었다. 처음엔 개인집인가 싶을 정도로 꽁꽁 닫혀 있다가 어느 순간 보니 문을 텄다. 그때부터 은행에 들르면 미술관을 한번 찍고 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림은 둘째였다. 그냥 그 집 정원 의자에 앉아서 나무며 꽃이며 둘러보고 멍이나 때리다 가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돌아나가면 이번 달 정산이 진정으로 끝나는, 일종의 자본사회 일탈에 대한 안도의 의식을 치른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은행 ATM기 전부 ‘점검 중’이라 붙어 있어 창구로 들어갔다. 직원에게 가서 돈 좀 빼 달라고 카드를 건네주었더니 갸우뚱한 얼굴로 카드 앞뒤를 한 참 돌려가며 보다가,
“아직도 이게 되나요?” “멀쩡해요.” “바꿔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거래 정말 오래 하셨네요.” “네. 오래만 했죠...”
그렇게 8년 동안 '상업은행 카드'는 내 학자금을 모두 갚았다. 2015년 겨울, 대전 상륙 1년 반 만에 나는 학업 선택에 대한 무시무시한 대가를 청산했다. 결혼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이듬해, 은행사의 강화된 보안정책으로 이 카드는 안락사되었다. “버려드릴까요?” 묻는 직원에 나는 카드를 돌려받아 그의 시신을 거두어 내 창고 전당에 고이 모셨다.
누군가 내게 대학원 진학에 대해 상담을 구하면 나는 우선 묻는다. 돈은 있냐고. 없다고 하면 천천히 내 카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근자근 곱씹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그 고통까지 감내하며 공부할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