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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17. 2019

9회말 2아웃, 공무원 합격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래. 빈민은 면했구나.


2014년의 5월 말. 아침 9시.


계약만료일을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날이었다. 늘 그랬듯 묵묵히 출근하고, 담담히 그 날의 할 일을 체크리스트에서 훑어나갔다. 잠시 후, 친구에게 한 통의 연락이 왔다.

“축하한다.”
“뭘?”
“니가 들어가서 확인해봐.”
“아!”

전원 누름. 홈페이지 접속. 다운로드. 로딩. 파일을 열었다.


합격자 안에 내가 있다.


내가? 진짜로? 7년을 하이에나처럼 일용직, 계약직으로 살며 서울 도심을 킁킁거리며 더 찾아먹을 것이 없나 기웃거리던, 정규직의 주변부만 달처럼 맴돌던 내가, 그래서 이제 막 이 지겨운 거지 같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아무도 찾지 않을 먼 곳으로 떠나려 했던 내가. 공무원 합격이라고? 공무원 시험 합격은 에듀땡 그거 맞다고?

내가 있는 사무실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내가 현재 소속되어 있던 기관의 공무원들이었다. 이것 봐라... 이 양반들 내 수험번호를 외우고 있었구나. 내 안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 퇴직금 안 주려고 11개월 부려먹고 내치는 사람들, 그것도 모르고 이 좋은 직장 왜 그만두고 나가냐고 눈치 없이 묻는 사람들.


모두들 내 신상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언제 발령이냐, 어디서 근무하는 거냐, 그럼 넌 무슨 일을 하냐 등등 돌아가며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심지어 여기 터가 좋다, 우리들이 응원해준 거 잊지 마라, 앞으로의 삶을 위해 기도해주마 자 앉거라 등등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싶을 정도로의 민망한 관심과 표현. 왜냐고?


난 6급 상당의 연구직 국가공무원 합격이었으니까.


이 지자체 소속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9급에서 7급 사이의 공무원들이었다. 9급으로 시작해서 7급으로 퇴직하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연령도 높은 편이었다. 그중에는 스스로 ‘일 잘하는 사람’으로 자칭하며 불꽃같이 승진 의욕을 불태우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6급이면 이 곳에서 팀장이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잘했다. 고맙다. 미안하다. 우리 아들 대단하다. 축하한다.


펑펑 울면서도 깨알같이 여러 수식어를 붙여가며 무한한 기쁨을 표현했다. 수화기 너머 소리의 엄마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멍하던 머릿속이 핑 돌면서 그동안 복받쳤던 설움이 터졌다. 나도 같이 울었다.

주무시고 있던 아빠를 깨웠다. 새벽 택시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 한참 잠에 들어 계실 시간이었다. 아빠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요 합격했어요.
그래 됐다. 이제 됐다. 고생했다.


그리고 뒤이어 붙인 아빠의 그 말 한마디가 지금도 가슴에서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빈민은 면했구나.




K군이 없으면 지금의 나도, 지금의 아무런 결과도 없다. 그는 30대 초반, 느닷없이 내 인생에 나타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만담이 잘 통해서 좋은 친구였다. 박물관 생활 동안, 남들은 거의 못 알아들을 수준의 암호성 '개소리'를 주고받았다.(거의 1분 내내 전화를 걸어서는 시작부터 “월월” 소리만 주고받고 끝내는 경우도 꽤 있었다.) 특히 그는 동물 성대모사, 행동 묘사에 능해서 그거 참 미친 짓 같아 수시로 구경하고 때로는 배워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수장고에서 유물 가운데 교지를 포장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가 한문과 역사에 상당한 내공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글의 뜻과 교지가 의미하는 바, 그 시점의 역사적 사건,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등 내가 감히 꿈꾸지 못할 수준의 통찰력이 그에겐 있었다. 충분히 배울만한 자였다.

K군에게 빨려 들어가듯 약 1년 간 공부를 배웠다. 그는 학자의 논리가 아닌 오지선 수험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명절만 제외하고 주말마다 신촌에서 만났다. 매번 욕을 먹어가며 하나하나 다시 시작했다.

“문제는 안 풀어도 좋아. 문맥 정리, 거기서 빼놓지 말고 외워야 할 것, 이해해야 할 것, 그것만 계속 반복해서 해. 너만의 정리노트, 너만의 생각으로 만든 핵심집. 그것만 계속해서 보강만 해. 문제집은 맨 나중이야. 넌 오늘 내 질문에 답 못하면 나랑 여기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거야.”

그를 알기 전, 나의 꿈은 객사였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운명이 ‘유목생활’이라면, 정말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시나리오라면, 내게 윤문 교열의 권한조차도 없는 고정불변의 인생 줄거리라면, 커트 코베인의 말대로 ‘활활 타올라 단박에 사라지는’ 삶에 충실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그 한 인간의 등장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질주하려던 나를 잡아 세워 강렬한 어조로 부탁했다.


공부한 게 아까워서라도 이번 한 번만 봐. 이상 나도 더 보라는 소린 안 할게. 꼭 봐.


마지막 한 번이라고 생각하고 치른 그 시험. 이로 인해 나, 가족, 친지, 친구,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공직 생활, 털끝만큼의 연도 없던 대전에서의 완벽한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2013년, 그렇게 대전사람은 서울로 합격하고, 2014년 서울사람은 대전으로 합격했다. 우리는 이때부터 술만 마시면 전생 타령을 했다. 분명 K군이 나에게 전생에 큰 빚을 졌거나 아니면 극악무도한 짓을 했거나, 어쩌면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 참여한 그가 조선병사인 나를 잔인하게 짓밟고 갔을지 모른다는 둥, 그래서 지금 그 엄청난 업을 갚게 되었다는 둥, 엉뚱한 주담을 나누었다. 가끔은 그래도 서울로 다시 올라오고 싶지 않냐 그가 물으면 나는 도마 위 동태 대가리를 대칼로 내려치듯 탁 잘라 말한다.

절대. 단 한 번도.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구하고, 장가를 가고, 가정을 꾸리고, 손을 얻게 해 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땅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터전이고 고향이다. 여기엔 오장육부가 터질 듯이 미어터지는 출근버스도, 발 디딜 틈도 없이 숨만 혹혹 내쉬는 지옥철도 없다. 사람, 마트, 교통, 술집, 자동차, 모든 것이 적당하다. 삼천만이 몰려 사는 과대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가 상존한다.


문화예술이 부족하다 불평하는 혹자도 있지만 내겐 전혀 그렇지 않다. 대전 예술의 전당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전시립악단의 실력은 서울시립악단 못지않다. 수많은 거장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대략적이면서 섬세한, 단조로우면서 흥미로운, 마음에 드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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