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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Nov 22. 2019

신혼집은 아내가 장만했다.

첫 시작. 중촌동 주공아파트.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찰나, 우리에게 한 가지 변수가 닥쳤다. 생각지도 못한 바로 그 ‘점(占)’이었다.


같이 살면 원수지간으로 지낸다.


뜨악하게도 양가가 모두 같은 점괘가 나왔다. 신랑 신부 네 살 차이는 사주팔자도 안 본다는 말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갑자기 두 집안이 신중해졌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보자. 어딜 가도 다 그렇게 나온다.’ 하며 우리 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강단진 여성이었다.


그건 남들이 하는 이야기. 살고 죽고는 내가 결정한다.


아내는 궁합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일절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 이후의 상황까지 생각하며 구체적인 ‘부부 살림 계획 수립’에 팔을 걷어붙였다. ‘결혼 프로젝트’ 스케줄을 엑셀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A3로 뽑아 스탠드 앞에 앉아 볼펜 색깔을 섞어가며 이것저것 체크하고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상의해보자.

 

이 사람이다. 이 사람과 같이 살아야 막혔던 내 인생의 혈이 마침내 뚫린다.


나는 수십 년간 내 운명이 내게 대했던 그 얄밉고도 교묘한 ‘생존방법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간파했다. 운명은 늘 나의 먹고사는 문제에서만큼은 너무나 가혹했다. 겪을 수 있는 고통이 있다면 까무러치게 울어댈 때까지 내버려뒀다. 절벽에 매달린 손가락 마디마디에 시퍼런 힘줄이 곤두서고 온 신경이 후들거려 에라이 떼어버릴까 생각할 때, 그때서야 이 친구는 저 편 어딘가에서 저벅저벅 느긋한 발자국 소리로 다가와 “그 정도 갖고 되겠어?” 킬킬거리며 내 손을 앙칼지게 잡아서는 번쩍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나지막히 귀에 속삭였다.

죽지 마라. 죽을 것 같아도 안 죽는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뒤로 갈수록 재미 있을테니 계속 고통을 즐겨라. 내가 보내는 생존 메시지는 알아서 알아채도록.


살면서 사람 보는 안목이 생겼다.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 따라 전국방방곡곡 도시, 농촌, 어촌, 산촌, 광촌 가릴 것 없이 남녀노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수천 번의 인터뷰를 나누었다. 그렇게 15년을 현장에서 살다보니 상대의 눈빛, 손짓, 말투, 갸웃거림, 대화의 물꼬만 봐도 그 사람의 기질과 기운, 캐릭터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최소 1년 정도는 만나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엄마의 권고를 나는 부드럽게 튕겨냈다.


“그 점인지 뭔지 믿지 말고 이 아들 한번 믿어 봐요.”


양가의 엄마들이 분주해졌다. 두 사람의 고집이 저리도 완고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또 점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번의 질문은 보다 구체적이었다.


“그렇게 궁합이 안 좋아도 해야 한다면 언제 해야 하나요?”


아이러니하게도 또 같은 값이 나왔다.

구태여 하려거든 올해가 지난 뒤에 하시오.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듬해 구정이 끝나고 2주 후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여기서 살지 뭐.”


“집은 어떻게 할까?” 물었을 때 아내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집이다. 이 집 문제로 파혼까지 치닫는 사례를 나는 무수히 봐 왔기에 이 질문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신랑이 집을 얼마짜리로 해 오면, 신부가 혼수를 그에 맞추어 보내겠다’며 양 집안이 팽팽하게 기 싸움을 펼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속으로 ‘아이고 난 틀렸다.’ 하고 웃고 말았다.


‘직장이 있으면 뭘 하냐, 부모가 돈 없으면 결혼 못하지.’


한 친구의 푸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 수중엔 청약통장으로 모아 둔 돈 외에는 사실상 푼돈 밖에 없었다. 관사에 살고 있던 나로서는 집, 그러니까 아파트를 마련해야 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다. 엄청난 이자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자가냐, 전세냐, 월세냐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밀어붙였다.

 "이곳에서 살겠습니다."  


아내가 살던 곳은 중촌동에 있는 주공아파트였다. 5층짜리 건물 몇 동이 모여 있는 좁다란 아파트단지. 전세 3천만이 채 되지 않는, 17평 남짓한 공간에서 아내는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혼을 시작하겠다고 그렇게 아내는 양가에 말씀드렸다. 부모님들은 걱정 반, 미안함 반으로 '그래 그렇게 다들 시작하는거지'하며 수긍했다. 아내의 모습이 크게 보였다.  


30년이 지난 건물의 이곳저곳에는 기미 주근깨가 박혀 있고, 시멘트 길 여기저기에는 깨져 부서진 곳들이 많았다. 단지 내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았다. 매화, 수국, 모란, 목련, 진달래, 산수유 하며 정말 식물원을 차려도 될 만큼의 다양한 꽃과 나무가 그득했다. 특히 담장 길옆으로는 벚꽃나무가 줄지어 있어 봄을 기대해볼만 했다. 아내는 이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래되고, 아름답고, 사람 냄새 나는 곳, 그런 곳에서 사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그래. 나도 좋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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