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신분이 낮은 사람이 지체 있는 미혼의 여자를 높여 이르던 말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사극에서도 나이든 하녀가 어린 규수를 하도 그리 부르니 사람들도 그런가보다 한다. 실제로 그런 뜻으로 사용된 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아기씨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그것이 계급사회의 상징을 띠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선 회의감이 든다.
아기씨라는 말 자체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철수씨, 김사랑씨 하고 사람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려했다. 특히 사대부가의 남성은 자나 호로 부르고, 여성의 경우도 어디댁 마님 어디댁 규수라 불렀다. 그런데 유독 규수를 규수님이라 하지 않고 면전에서 아기씨라고 부를까?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기의 씨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씨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생명의 뿌리를 가지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 그 자체다.
지금도 정월대보름이면 명산이고 동산이고 가릴 것 없이 산이란 산에서는 산신제가 열린다. 산신제는 집안에 초상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체 없는 남성들만을 추려 지낸다. 이 남성들은 한달 전부터 일체 성관계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겨울철 산에서 내려오는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목욕재계를 해야한다. 제의 당일이 되면 잡담을 금하고 입에 종이를 문 채 깊은 산제당으로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산신제의 키워드는 '극한 폐쇄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여성은 절대 올라갈 수 없다. 남존여비? 아니다.
산신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놓인 산 꼭대기에 남성들이 올라가 밤새 기도를 드리며 기꺼이 제물이 되는 것은, 올 한 해도 여신께서 마을의 안과태평을 가져다주고 가정에는 아기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고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간곡히 요청하는 것이다.
결혼 후 반년 쯤이 지나자 아내는 서서히 아기에 대한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술 좋아하는 나를 잡기 시작했다. 회식만 다녀오면 혼줄이 나고 잔소리를 먹었다. 나도 함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날 받았습니다.
요즘 남성들이 회식자리에서 술세례를 받지 않기 위해 쓰는 가장 강력한 마법의 언어이다. 그러면 아무도 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어떤 높은 상사든, 할아버지든 중요한 날을 받은 젊은 남성을 건드릴 수 없다. 이런 날은 일찍 귀가한다. 목욕재계를 한다. 그렇게 또 6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날 퇴근해서는 저녁먹을 준비를 하려는 찰나, 아내가 화장실에서 급히 뛰쳐 나왔다.
여보! 이거 두 줄 맞지?
어?? 정말 두 줄인가????? 두 사람은 숨 죽인 채 부엌에 서서 하염없이 테스트기를 지켜봤다. 맞았다. 두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일단 침착하자. 우리는 그렇게 몇 주를 조용히 보내며 병원에서의 최종결과를 기다렸다. 정말 임신이었다. 아기씨에 싹이 튼 것이다.
근데. 태몽은 없나?
그제서야 양가에 알리니 태몽은 울 엄마가 꿨단다. 엄마는 아내가 임신한 그 달에 밭에서 무를 뽑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무를 뽑아 트럭에 싣는 족족 차곡차곡 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서는 떨어지지도 않고 반듯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더란다. 또 하루는 무밭에 가서 무를 뽑는데 어떤 무 하나가 하도 안뽑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무를 당기니 사람보다도 큰 새하얀 무가 땅 속에서 솟아 나오더라는 것이다.
엄마 왈, 무는 아들이라 했다. 정말 아들이 맞았다. 우리는 별의별 해석을 다 갖다붙였다. 오래된 아파트라도 나무가 많아 땅의 기운이 좋았다. 1층에 살아 지력을 잘 받았다. 대전이란 땅이 큰 밭 아니냐. 우리 부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태항아리를 집에 들였다.
2017년의 크리스마스.
“자긴 그냥 밖에 있어.” “왜???” “남자들 애 낳는 거 보고 실신하는 사람도 많대.” “아니 내 자식 낳는 걸 보는데 무슨 실신까지 하지?” “뭐 징그럽다고 하던데? 토하는 사람도 있대. 괜찮겠어?” “그 사람들은 날개 달린 캐릭터 아기가 나올 줄 알고 들어갔나 보지?”
나는 무조건 분만실에 들어갈 테니 그리 알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기를 낳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부터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는 모든 과정을 다 내 눈으로 볼 거라고 했다. 엄연히 지구의 한 생물로서 자신의 새끼를 맞이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기의 탄생을 기다렸다.
출산예정일로부터 열흘이 흘렀다. 이제는 아기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의사의 말에 아내는 그 날로 대전의 한 병원 분만대기실에 입원했다.
아내는 유도분만 링거를 맞았다. 그래도 아기 문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일을 기약하자 하며 돌아갔다. 링거를 빼자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던 아내가 언제 그랬냐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리는 티비를 보며 갸웃갸웃했다.
내일은 아기가 나올까?
아침이 되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다시 링거를 꽂았다. 아내는 온갖 아픔이 밀려오는지 거의 데굴데굴 구르다 싶더니 나중엔 나도 거슬리는지 아예 밖에 나가라고 했다. 여전히 아기 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속이 타 들어갔다. 양가에서 전화가 쏟아졌다. 그렇게 네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가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서는 의사를 불러달란다. 더 이상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고. 그냥 제왕 절개하자고.
의사가 상태를 보더니 말렸다.
이제 아기 문이 열리고 있다. 조금만 더 기운 내라. 자연분만할 수 있다.
정말 순식간에 아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후 1시. 아내는 급히 분만실로 옮겨갔다. “아버님 들어오실 거예요?” 묻는 간호사의 말에 냉큼 옷을 차려입고 따라 들어갔다. 힘주라는 의사와 간호사의 말에 아내는 이마의 힘줄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손에 꼭 쥐고 있는 쇠받침대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며 악을 썼다.
2018.1.5. 오후 1시 20분.
아들은 그렇게 15분 만에 세상에 나왔다. 탁탁 아기 엉덩이를 두 번 치고 나니 곧 우렁찬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가위를 받아 아들의 탯줄을 잘랐다. 간호사는 능숙하게 아기의 배꼽을 만들어서는 체중을 쟀다. 3.3kg. 정상이었다. 아들이 내 품으로 쏙 하고 안겼다. 옆에서 눈코입귀 손가락 발가락 다 확인하라고 한다.
다 정상이구나. 나를 보고 있구나.
아내에게 다가가 아들을 안겨줬다. 아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아기, 내 아기” 그 조그마한 생명체를 가슴에 얹고서 꼬옥 쓰다듬었다. 셋이 한번 같이 안아보자. 내 그렁그렁한 눈에서 주르르 기쁨이 흘렸다.
다음 날, 나는 구청에서 가서 출생신고를 했다. 출생지는 대전광역시. 내 아들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대전이다. 대전을 중심 터로 삼아 성장할 것이다. 치열한 각축의 장 중원 땅이 아닌, 넉넉한 형주의 땅에서 수많은 명사들과 함께 둥글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