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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Dec 29. 2019

아파트는 난생처음이라  

스물네 평 세 사람 보금자리, 샘머리아파트

대체 집이 어딘지 모르겠어


2017년의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우리는 중촌동 주공아파트에서 둔산동 샘머리아파트로 이사했다. 배가 불러오는 아내에게 이사를 맡기고서 새벽같이 출장길에 나선 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출장 틈틈 아내 컨디션을 확인하고, 이사 상태를 점검했다. 업무를 마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거대한 모빌 사이에 갇혀 나는 집을 찾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단지 안에는 들어왔는데.. 근데... 대체 집이 어딘지 모르겠어..."

"집이 어딘지 모른다고??? 몇 단진데?"

"1단지는 맞고... 동수도 맞는데... 호를 못 찾겠어."


아내가 푸하하하하 웃으며 곧 내려오겠단다. '아니 동은 맞는데 동 안에도 1, 2, 3, 4, 5, 6 되게 많네.. 뭐가 이래?' 두리번두리번 대는데 저 편 1층 현관에 불이 들어온다. 아... 저기구나.


"이걸 왜 못 찾아?"

"아니 난... 분명히 층수는 맞는데 호수를 못 찾겠는 거야.. 1호랑 2호랑 같이 묶이고... 이런 식이구나..."

"아파트에서 안 살아봤어? 아. 그렇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누구네 아파트에도 놀러 가 보고 그랬을 거 아냐?"

"그렇지... 그랬지... 근데... 그... 다들 마중을 나와서... 여하튼 이제 알았으니 된 거지 뭐."


알츠하이머에 걸려 아파트 호수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병자가 된 기분이었다. 조선시대에서 날아온 사람도 아니고 참. 그렇지만 달리 변명이나 핑계는 필요 없었다. 난 정말 아파트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전에 살던 중촌동 주공아파트는 아파트라기보다는 빌라에 가까웠다. 건물도 5층에 엘리베이터도 없고, 단지라 할 것도 없이 건물도 몇 채 되지 않았으니까 헷갈릴 여지도 없었다. 저녁 먹고 단지 내를 30번 빙빙 뛰어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딱 그 정도의 크기. 내겐 아파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중촌동. 나름 1년 넘게 살며 정든 동네였고 집이었지만, 머지않아 세상에 나올 아기를 키우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오래된 건물에는 곰팡이가 수시로 번졌고, 무엇보다 다가올 추운 겨울이 문제였다. 떠나야 했다. 우리는 그간 모아두었던 돈(대부분의 돈은 아내가 저축한 것이었다)에 대출을 끼고 공무원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동향의 9층 집이었다.


처음 집에 들어섰을 때의 부르짖은 환호성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넓은 집에서 살아보다니! 방이 세 개나 되다니! 베란다가 이렇게 멋지다니! 아내는 '서울촌놈'이라며 놀리면서도 한 층 업그레이드된 우리 집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20년이 넘은, 요즘처럼 주차장과 집이 일체형도 아닌 90년대 버전의 아파트였지만 우리에겐 그저 과분할 따름이었다. 신혼부부인 데다가 아기까지 있어 6년까지 살 수 있었다.

그래. 우리 셋이 사는 집이다.


아파트 이름이 특이했다. 샘머리라니. 온 주변의 아파트들은 목련에 무지개니 크로바니 무궁화니 이런데 하필 여기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와. 찾아보니 정말 과거 이곳에 샘터가 있었단다. 시공사의 센스가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다 비슷한 콘크리트 건물이긴 하지만 이 독보적인 브랜드명을 가진 이 곳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직장과의 거리가 절대적으로 가까워진 점이 좋았다. 걸어서 15분이면 사무실 내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코 앞에 정부청사 있었다. 중촌동에서 차로 다리 넘어오며 허비하는 30분의 시간을 단방에 날렸다. 야근하다가도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안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샘머리아파트는 1단지와 2단지로 나뉜다. 2단지는 대부분 민간 소유이지만 1단지는 공무원공단이 상당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고로 상당수의 공무원들이 여기에 거주했다. 출근길 퇴근길 걷다 보면 청사의 수많은 직장동료와 상사들과 마주쳤다.

말 그대로 집공촌이었다.


국가직 공무원의 국가관은 태극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중요한 공휴일이면 늘 단지 내에 태극기가 한가득 휘날렸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수많은 태극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대한국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닌 공직자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은 세계 전기절약의 날이라고 해서 방송으로 "10시 정각에 10분 동안 소등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그래 얼마나 지키나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정말 단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모든 호수가 불을 껐다. 정확히 10분 동안 흐르는 암흑의 고요함. 정말 법과 규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곳에 살며 단지 내에서 술에 취해 길에 널브러져 있는 행인을 본 적이 없다. 들어 본 고성 고음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 모든 것이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밑 층, 윗 층, 옆 건물, 옆 동, 앞 동, 뒷 동 모두 같은 청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경거망동했다가는 괜한 입방에 오르기 쉬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좋았다. 아무리 술에 절어도 꼿꼿하게 서서 인도를 걷고 동수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닫기까지 쓰러지지 않았다.


모두가 조심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입주하고 얼마 후 앞 집이 이사를 나갔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삼삼오오 같은 층에 내려서는 살금살금 그 집으로 들락날락했다. 그런데 그 청년이란 작자들이 동일인물이 아니라 수시로 얼굴이 바뀐다는 점이 조금 이상했다. 나중에는 커플끼리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았다. 꺼림칙했지만 바로 맞은편 이웃이고 그렇다고 별다른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다. 그렇게 아내의 산달이 임박해가고 있었다.


어느 주말이었다. 초저녁부터 앞 집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많이 왔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시간이 9시, 10시가 되어가도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오히려 데시벨은 더 올라가기만 했다. 급기야 11시가 되자 거진 1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의 웃음바다가 우리 집을 덮쳤다. 아내의 신경이 곤두섰다. 12시가 다가오자 앞 집은 거의 술집 분위기로 넘어갔다. 아내는 잠을 못 자고 끙끙댔다. 나는 불같이 일어나서 잠옷 차림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윗 집, 아랫집에서도 계단으로 기웃기웃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세 번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술집 같던 집 안에 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젊은 남자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네 무슨 일이세요?" 나에게 물었다. 열린 문 사이로 길게 늘어선 술상이 보였다. 그리고 족히 30명은 넘는 새파란 '새내기'들이 앉아 술병을 쌓아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구요? 지금 12시잖아요. 다들 자는 시간이에요. 앞 집 윗 집 아랫집 생각 안 해요? 그리고 우리 아내는 곧 산달이에요. 잠을 못 자고 있어요. 서로 지킬 건 지키고 삽시다. 알았죠?"


술자리는 곧 정리되었다. 아내는 괜히 나가서 왜 매일 부딪히는 앞 집에 화를 내고 오냐며 핀잔을 줬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왜냐면 우리 가족이 살아야 하니까. 자기 그리고 아기가 다칠 수 있으니까.


아내와 태아와 나.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는 집을 침범하니까. 술기운 넘치는 애들한테 평생의 중요하고 신중한 태아의 성장을 방해받을 순 없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여기까지 생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뜨거운 불길을 지나왔는데. 서른여섯 살의 한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단 스물네 평의 땅뙈기를 확보하기까지란 얼마나 고되고 겨웠던가. 나는 삼십 년 평생 지킬 것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하루하루를 밀고 버티고 밀고 버텨온 그런 촌스러운 놈이었다. 가정의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몸소 익혔다.


제길.  '서울촌놈'의 수컷 본능이란.
 


샘머리아파트 주변은 차보다 유모차가 많다. 출근길이면 아기 아빠,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청사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퇴근길에도 엄마, 아빠는 아기를 찾아 집에 데려가기 바쁘다. 

휴일이면 아파트 주변 공원은 그야말로 아기들 세상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부모 품에 꽁꽁 싸여 바깥바람을 쐬고, 반년 이상되어 보이는 아기들은 유모차 속에서 멀찌감치 놀이터에서 뒤뚱거리는 선배 아기들을 구경하고 있다. 10개월 차 친구들은 벤치 주변을 어슬렁댄다. '베이비 월드' 속에 갇혀 있다 보면 출산율 최하위 국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아내는 샘머리 단지에서 아기 엄마 몇몇과 친구가 되었다. 보통 낮에 애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면 엄마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또래의, 비슷한 시기의 아기를 유모차에 끌고 가는 이들을 탐색한다. 그러다가 ‘눈팅’이라도 하면 가벼운 눈인사로 몇 차례 교감을 주고받다가, “아기 몇 개월이에요?”, “아 우리 애도 몇 개월인데!” 하며 친분의 문을 연다. 그리고 되었다 싶으면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으며 정식으로 약속을 잡는다. 

이후에 친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어차피 다 비슷한 ‘처지’의 군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부부공무원 아니면 공기관+공무원, 공기관+공기관, 공무원/공기관+민간기업 커플 범위 오차 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사 신설 내지 이전에 따라 외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내려온, 조금은 막막하고 적적하고 두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이주촌’이다. 


사는 문제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육아 휴직 중인 엄마들은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면서 육아라는 하나의 주제로 급격히 가까워진다. 아기라는 강력한 끈으로 서로 간에 수시로 친구의 집에 놀러 간다. 이 집 아이는 우리 아이에 비해 이렇더라, 여기는 부모가 육아관이 요런 면에서 다르더라, 그래서 집에 장난감이 어떻고, 남편이랑 저렇게도 지내고, 시부모님은 얼마나 자주 오고 이런 세세한 이야기들을 아빠와 공유한다. 

아빠 입장에서도 환영이다. 돌잔치는 어떻게 그리고 얼마큼의 규모로 할지, 어린이집은 각 기관마다 어떻게 다른지, 아기 재우는 방법은 무엇이 더 맞을지, 우리 부모님에게는 언제쯤 도움을 요청드릴지 좀 더 상세히 고민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계절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아내와 아기다. 만추가 아까워 근처 공원에서 낙엽 지는 나무 아래 호시절의 사진을 남겼단다. 

나는 샘머리아파트를 ‘공동육아구역’이라 부른다. 아파트라고 해서 다 똑같은 아파트는 아니다.



이전 09화 아내는 두 줄을 외치고,  엄마는 무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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