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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Dec 04. 2019

아빠의 꿈, 출판사

책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열정


2014년 초여름의 대전.


대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아빠의 연락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매일 새벽이면 일어났냐 모닝콜로 시작하여 전화, 카톡, 문자 가릴 것 없이 아빠의 안부가 날아왔다.


밥 먹었냐.
오늘은 무슨 출장을 갔냐.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는데 너는 해당 없냐.
야근은 몇 시까지 하냐.
운동은 했냐.
잘 시간인데 안 자고 뭘 하냐.


아주 사소하고도 광범위한 질문들이 깨알같이 쏟아졌다.


나는 유년기 시절부터 아빠에게 꽤 솔직했다. 사춘기를 넘기면서부터 연애, 진로, 공부, 친구, 군대 할 것 없이 뭐든 아빠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질문에 대한 아빠의 조언은 점차 간결해지고 관조적으로 변해갔다. 니 인생은 니가 결정하는 것, 달리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빠에게 서른 중반의 아들은 여전히 꼬맹이로 보이는지 홀로 타향살이에 매사 걱정과 궁금증이 넘쳤다. 하지만 나도 점차 대답이 짧아졌다. 아빠가 딱히 결정해줄 수 있는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는 “그래 이젠 됐다. 마음 놨다. 알아서 잘 살아라” 하고는 정말 그다음 날부터 용건 없이는 연락하지 않았다. 서른여섯 추석에 가서는, “다른 건 중요한 거 없다. 넌 니 아내만 신경 쓰면 된다” 한 마디뿐이었다. 단, 늘 하시는 질문은 여전했다.


글은 꾸준히 쓰고 있냐.


글을 쓰는 데 있어 최종 검수자는 언제나 아빠다. 이 마지막 검수가 가장 날카롭고, 아프다. 이것은 지도교수님의 관점과는 또 다르다. 교수님은 학문적 관점에서의 충족 여부에 초점을 두지만, 아빠는 독창성과 범용성에 더 무게를 둔다. 따라서 학술적 검증을 어느 정도 마친 상태에서 아빠에게 글을 들고 가도 반응은 썩 긍정적이지 못하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보면 쉽게 그 예상 점수를 짐작할 수 있다.

2006년 학자대회 최우수상 논문은 글도 아니라고 했다. 곰소염전 수상 논문은 1차 자료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다음부터 절대 이렇게 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에 훗날 단행본집에서 보강했다. 성북동 논문에 대해서는 관점은 있으나, 반응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확했다. 2010년 또 한 번의 학자대회 우수상 논문에 이어 석사논문에 대해서는 범용성의 문제를 지적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던지는 논점 자체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부터 '과연 정통학만을 고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정통학이 아닌 활용학의 문제로 넘어가면서 아빠의 반응이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넘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스토리텔링 논문을 등재했을 때 등재 자체만으로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이쪽 부분도 계속 써 나아가라고 격려해주었다. 아빠는 그때 암수술을 받은 직후였지만, 입원실에서 늦은 밤까지 스탠드 불을 켜놓고 몇 번을 더 검토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좀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스케일 있는 논문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학술 동지들과 함께 한국 향토산업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사회과학 분야와의 검증 연계방안을 제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바로 모 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세미나 초청이라는 반응이 왔다. 뒤이어 마음이 맞는 학교 후배, 회사 동료며 군대 후임에 초등학교 동창까지 모아 함께 기행문을 쓰기로 결심하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2년 간의 현장조사와 탈고 끝에 2014년 봄, '군산 최초'로 군산 문화유산 기행문을 책으로 출간했다. 책을 쥐어든 아는 그간과는 조금 다른 조언을 해주었다.


글의 전성기도 사람의 기세에 따라가는 것이다. 지금은 쓰는 대로 좋은 결과가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 좋은 흐름을 유지할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길어야 5년이다. 앞으로 체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에 따라 글의 기세도 꺾일 것이다.

쓸 수 있을 때 몰아쳐야 한다. 논문은 끊임없이 써라. 이것이 앞으로 널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글도 써라. 소설, 수필, 콩트 닥치는 대로 남의 글을 보고 익히고 소화해야 한다.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쉬지 말고 이런 글들을 써야 한다. 이것이 나중에 더 중요해질 수 있다.

던지는 화두가 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세려면 다른 분야의 글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만하면 거기서 성장은 멈춘다. 지금은 실력자들이 도처에 넘쳐흐른다. 그들이 글을 어떻게 풀어쓰는가를 지켜봐라.

교수나 권위자에게 물어볼 수는 있어도 결코 의지하지 말라. 아무도 널 도와줄 윗사람은 없다고 생각해라. 스스로 실력을 쌓고 살아남아야 한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승부는 과감하게 걸어야 인생에서 후회가 없다. 그러려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빠는 중졸이었다.




막내 삼촌은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지 누굴 닮겠냐 하니, 니가 아버지한테 화내는 게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화내던 모습과 꼭 닮았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아버지 없는 자리에서 내게 슬쩍 흘린 것도 막내 삼촌이었다. 아버지처럼 키워준 큰 형에게, 아니 큰 형의 아들에게 그게 할 소린가 싶어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막내 삼촌은 당신의 큰 형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다.


무슨 상 강준형. 무슨 상 강준형. 상 강준형 • • •


셋째 삼촌이 기억하고 있는 아빠 국민학교 졸업식의 단상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아빠는 최우수 학생이었다. 그런 아빠가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논과 밭에 묻혀서는 농사일만 짓겠다고 선언을 하니 온 가족이 놀라 자빠졌다. 그러나 아빠가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에 대해 삼촌도 알지 못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비로소 나는 아빠에게 당신의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고. 아빠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며 한참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뗐다.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아빠는 1948년 고양시 오금리 마을에서 강씨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요즘에야 고양시 오금동이 서울권의 금싸라기 땅이라지만 그땐 논과 밭, 민둥산, 나뒹구는 폐허뿐이었다.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아빠의 유년기는 그랬다.  


할아버지는 한 때 마을 훈장을 맡아 아이들에게 훈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도통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장남인 아빠는 가족먹고사는 문제의 일선에 서서 집의 논밭은 물론 남의 소작 붙여먹는 일, 누구네 집 허드렛일, 나뭇일 등 온갖 궂은일은 혼자 도맡았다.


할머니는 재혼의 여성이었다. 처음 결혼했던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재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맞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첫째 부인과 갈라섰다. 똑같은 재혼이어도 남녀의 취급은 천지차이였다. 당시 과부는 집안의 망신거리, 골칫거리였다.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골 잔반 집안의, 거진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왔다.


할머니의 부친, 나에게 있어 증조할아버지, 그분께서 종로 낙원동 일대에서 연탄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할머니 입장에서는 두 번째 시집은 그야말로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였을테다. 하지만 더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도 고령과 지병으로 사업을 더 이상 끌고 나가기 힘들자 우리 할아버지에게 전권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양반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이 같은 발언은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볼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는 평생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강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그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종가의 종손이라는 위치와 체면을 지키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었다. 그 최선은 '선비'로서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 외에는 없었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에도 신분사회의 잔재가 한 동안 그대로 지속되어 양반이 지나가면 머슴이 인사를 하고 길을 터는 일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고 했다. 이 마을은 산업화 시대와는 거리가 먼, 아직도 구한말이 이어지고 있는 고립되고 폐쇄적인 전통사회였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사, 농, 공, 상의 구분은 엄격했고, 공업과 상업은 '사'가 손대서는 안 될 일종의 금기 같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빠는 분노했다. 당장 붓을 꺾고 논으로 나갔다. 할아버지도 대노했다. 장남의 종손이 어찌 글공부를 하지 않고 농사만 지으려 하냐고. 아빠는 비웃기라도 하듯 학교를 완전히 그만두고 묵묵히 식구들 입 풀칠에만 매진했다. 아빠는 이것이 세대 간 갈등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고 했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했다.

아무도 생계를 책임지지 않았으니까.


아빠가 스물다섯이 될 무렵, 아빠 인생의 큰 분기점이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한 마디 유언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집안의 종손이고, 동생들의 아버지가 된 아빠는 당신께서 마음에 품고 있던 계획을 드디어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출판사로의 취직이었다.


지인들의 도움과 추천으로 서울 종로 산업은행 빌딩에 있는 출판사에 입사했다. 윤문 교열 보는 일부터 시작했다. 7~8년에 걸친 근무에서 배울 수 있는 출판에 대한 모든 것을 당신 것으로 만들었다. 


출판사에서 빌려볼 수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정독했다. 특히 시, 서, 화에 몰두했고, 회사에서 뽑는 '이 달의 독서왕'은 늘 아빠 독점이었다. 매일 같이 밤새도록 책만 팠다. 엄마는 아빠의 독서열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서울집에 아빠가 모았던 옛 도록들을 봐도 당시 아빠의 열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빠는 회사생활과 병행하 당신의 출판사의 설립을 준비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회사 짓는 일에 몰두했다. 처음엔 사무실도 없이 다니는 회사에서 주는 일을 하청 받다가, 점차 수익구조와 루트가 확대되고 자금이 모이면서 아빠는 회사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광화문에 자리한 3층 건물을 자신의 금자탑으로 정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빠 회사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는 일찌감치 나 스스로 회사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창덕궁 앞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새문안교회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 하얀 건물을 찾으면 된다. 1층에서 경비 아저씨가 늘 반가운 인사로 맞아주셨고, 2층으로 올라가면 수십 명의 직원분들이 286 컴퓨터 앞에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꼬마가 나타나면 많은 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주며 말동무를 해주셨다. 직원 아저씨와 함께 어두컴컴한 사진실을 구경하거나, 새로 나온 북 코너의 디자인 책을 보기도 했다. 3층으로 올라가면 파티션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다. 좌측 창가 맨 끝에 검고 두툼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책을 쥐고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1980년대, 아빠 인생의 황금시대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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