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떠나다
2007년, 17살 어리지 않은 나이,
나는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빠와 아빠가 잘 나가던 시절 함께 사업을 했던 아빠의 사촌형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가 선물해 주셨던 책 한 권.
‘전교 꼴찌 에스더손의 케임브리지 입성기’
한국에서 가난한 환경에서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했던 꼴찌소녀가 케임브리지에 올 A를 받아 입학하게 되는 좌충우돌 스토리이다.
나는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그리고 꿈꿨다.
‘나도 갈 수 있을 거야 명문대.’
필리핀에서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말도 안 통하는 환경,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로웠다.
아빠와 큰아빠와 함께한 일주일은 꿈같았다.
마닐라베이, 알로하호텔(아빠의 추억의 장소), 아리스토크랏(레스토랑), 여행지와 유적지들..
공기는 습하고 햇살은 뜨거웠다.
한국에서 나를 짓누르던 가난의 모습은 없었다.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멋지게 성공의 꿈을 품었다.
나는 아빠의 옛 사업 파트너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다 괜찮아 보였다.
하루 7시간 개인 과외를 받으며 영어를 익혔다.
잘 들리지 않고, 말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친절한 필리핀 선생님들은 웃으며 끝까지 잘 가르쳐줬다.
그때도 인정받고 싶었다. 누구에게든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농땡이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같은 또래 학생들 8명, 어린 초등학생 친구들 3명.
집은 늘 북적북적했고, 친구들은 밝았다.
마닐라 중심지와 조금 거리가 있는 아라네타라는 동네,
평일엔 학교에 가고, 주말엔 올티거스나 마카티에 가서 놀았다.
유교걸로 자란 나는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곧 친구들과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듣게 되었다.
아빠가 나의 생활비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 내 가정 형편을 친구들 앞에서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아빠가 돈을 못 보내줘서….”
그 말이 공기 속에서 맴돌았고,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돈도 없는 애구나. 나는 이렇게까지 망가진 집안에서 왔구나.’
한국에서 어려움 없이 자란 친구들 앞에서,
나는 발가벗은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창피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내 룸메이트 친구는 분당에서 왔는데..
그 친구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라 여기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아빠랑 통화하며 한국에 가고 싶다고 울고 또 울었다.
공부는 마쳐야 한다는 아빠의 말.
너무 미안하다는 아빠의 사과..
나는 아침저녁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빌리지를 뛰고 걸었다.
나의 룸메이트 친구는 필리핀의 청담과 같은 올티거스로 이사를 갔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친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반면,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내가 더 미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한국에서의 환경이 싫어 떠났는데, 필리핀에서까지 이런 삶이라니.
숨이 막혔다.
우리 빌리지와 학교,
나의 삶이 레고 세상 같이 작게 느껴졌다.
졸업하는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원형탈모, 생리불순, 피부트러블, 식이장애, 불안장애를 경험하며 드디어 졸업식날.
고등학교 유학시절 딱 한번 통화했던 엄마,
졸업식엔 엄마가 오셨다.
너무 기뻤다.
엄마가 와서. 괴로운 시간이 끝난 것 같아서.
이제 해방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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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숫자에 집착했다.
생활비, 친구들이 입고 있는 옷의 가격, 내가 가진 돈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계산했다.
‘나는 절대 가난해 보이면 안 돼.’
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더 비참한 건,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내 존재 자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생각했다.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 잘못된 믿음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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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와 자존감
나는 필리핀에서 한 남자애를 좋아하게 됐다.
그 애는 내게 관심을 보였고, 잘해줬다.
나는 ‘이제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관심이 식었다.
그 이유를 몰랐지만 혼자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나는 못생겼어.’
‘나는 별 볼일 없는 애야.’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날 이후, 나는 돈과 외모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게 되었다.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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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마게테, 새로운 시작?
2008년, 나는 필리핀 두마게테에 있는 실리만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은 내게 새로운 기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여전히 가혹했다.
나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교회에서 파송된 목사님의 딸이 있던 곳에서 머물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이제는 좀 나아질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나는 여전히 가난한 아이였다.
그리고 또다시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나는 이곳에서도 초라한 존재야.’
나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작은 일이라도 하려고 했다.
운 좋게도 나는 한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하숙집을 운영하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일부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이 사는 학생들의 밥을 해주고, 집을 청소하고, 하숙집을 관리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나는 결국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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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신앙
대학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이 있다면 신앙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찬양팀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사람들이 함께 찬양을 부를 때면,
나는 잠시나마 현실의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돈이 없어도 괜찮았다.
가족이 없어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안정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늘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기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돈과 외모에 집착했다.
일 년에 한 번 방학기간에 한국에 나가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린이집, 유치원, 음식점, 과외..
대학시절동안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의 가치를 나보다 더 높게 평가해 주는 사람들.
나의 장점을 찾아주는 사람들.
내가 나를 부정할 때, 그 동굴에서 나를 꺼내줬던 사람들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님은 오시지 못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6년의 유학.
재미있는 추억들도 너무나 많지만,
내겐 꼭 지내야만 하는 수련의 기간 같았다.
홀가분했고,
돌아가고 싶었다. 우리 집으로. 가족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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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그리고 현실의 벽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또다시 현실과 마주했다.
엄마 아빠는 이혼을 한 상태였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나는 빨리 성공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약해질 수 없었다.
나는 취업을 준비했고, 곧 사회로 나아갔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곳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상처와 불안의 연속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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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3장: 사회의 벽 앞에서
첫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이용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버텨야 했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