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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제니 Dec 31. 2020

2020년, 멈춤과 회복

상상 못한 변수가 함께했던 올해의 조금 다른 키워드들

코로나는 많은 것을 멈추게 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불가항력적 멈춤은, 이제껏 스스로에게 좇기던 나에게 아이러니하게 휴식을 주었다. FOMO(Fear of Missing Out)가 아닌 J(Joy)OMO를 최대한으로 맛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지쳐있던 게 맞음을 확인했다. 일을 하는 마음도, 아픈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잠시 멈추고,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가고 싶냐고 내게 천천히 묻고 천천히 대답을 기다렸다. 생활 속 여백은 다음 올 것들을 위한 재활의 시간이 되었다.

방출, 확산되지 않은 에너지는 오롯이 내 안에 쌓여 이전과는 꽤나 다른 한 해의 키워드를 남겼다. 이런 한 해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걸 보면, 그리고 몰랐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많은 동료와 친구들이 회고하는 걸 보면, 사람에게는 다양하고 과감한 변수 속에 자신을 그려보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코로나를 휴식과 변화의 계기로 사용할 수 있는 건 특권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좋았던 것들을 가져가되, 거리를 두어야 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2021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올해의 키워드


1. 일하는 마음

작년에 대표님께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었다. 내가 평생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언젠간 안정을 찾아갈 거라면 어쩌면 지금 그런 삶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나의 '지쳐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열심히도 하지 말고 앞으로 올 긴 시간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을 갖자고.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게 필요했던 건 '재활'이다. 몸만 재활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일하는 마음에도 재활이 필요하다.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일하며 살고 싶은지, 일하면서 자주 느끼는 불안감의 뿌리는 무엇인지를 찬찬히 솔직하게 대답해보았다. 회사에서, 주변에서, 책을 통해 일하는 다양한 마음과 모양새를 관찰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일을 잘, 오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내년이 기대되는 큰 이유다. 교수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안식년을 가지듯, 직장인들도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해 답을 찾을 수 있는 안식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 홀로 서기

작년은 아픈 가족으로 인해 많이 울었던 한 해였다. 병이 깊어지는 과정을 받아들이고, 순간들에 대처해내고, 어른으로서의 몫을 해내야 하는 긴장된 상황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끊임없이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때로는 나의 무게가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었으리라.

코로나는 야속하게도 보고 싶은 가족을 보지 못하게 했다. 보지 못해 아팠지만, 멈춰 서 곪아가는 곳들을 잠시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있던 내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너무 힘들지 않길 가족도 원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작년만큼 특정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번갈아가며 나의 짐을 짊 어지 우려했던 친구들에게도 올해만큼은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함께 할 때 강해짐을 안다. 하지만 나로서도 단단하고 싶었다. 단단해지기 위해 지나온 터널을 스스로는 알고 있으니, 아낌없이 기특하다고 말해주어야겠다.


3. 베이킹

오래간 다시 하고 싶던 취미인 베이킹을 드디어 실행으로 옮겼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부분을 디지털화 세계 속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직하고 고결한 노동의 맛을 선사한다. 일하는 만큼 정직하게 손에 생산품이 쥐어지고,  많이 공부하고 공을 들일수록 재미가 배가 된다. 확실히 10대 때와는 달리 책과 유튜브로 이론을 무장하고 베이킹을 하니 금세 쑥쑥 늘어 더 신이 났다. 실행력은 습관이라고 했던가. 올해는 유독 많은 것을 실행한 해였다.

스콘만큼은 선물하지 않고 거의 내가 먹었다. 갓 구운 영국식 스콘은 그야말로 홈베이커의 특권.

 

4. 환경

환경 챙기기도 하나의 실행이었다. 친환경은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의사 선택에 높은 우선순위로 두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개인적으로 참 멋있다고 생각하는 지인이 말씀하셨다.

올해는 환경을 위해 작은 것들을 많이 실천했다. 커피를 끊으면서 자연스럽게 플라스틱 컵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코로나 초반에 배달음식을 시켜 먹느라 사무실에 일회용기가 너무 많이 나왔을 때는 도시락을 싸들고 회사에 가기도 했다.

분리수거에 있어서도 몰랐던 것들을 꽤나 많이 공부했다. 이를테면 플라스틱 빨대는 작아서 재활용률이 떨어져 차라리 일반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분류 작업자 분들에게 차라리 낫다는 것, 페트병을 버릴 때 몸체와 소재가 달라 뚜껑은 꼭 열어서 버려야 한다는 것, 코팅된 종이는 일반쓰레기에 버려야 한다는 것 등 꼼꼼히 공부하지 않으면 놓칠 것들 투성이었다.

환경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건, 나를 이루는 것들에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내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에 대해 인식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자존감의 조각이 된다.

햇반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한 번의 도시락으로 많은 플라스틱을 줄일 수 있었다.

5. 다이어트

감량에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도, 꾸준한 홈트와 건강한 식습관으로 천천히 쪘던 체지방을 천천히 제거했다.


1. 공복에 체중 재기

2. 일어나자마자 오전 홈트 (주 3회 이상)

3. 탄수화물 줄이기

4. 빵은 3번 먹고 싶을 때 한 번만

5. 12시간 공복 유지


가 올해 찾아낸 나의 건강 루틴.

홈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잘 맞는 유튜버를 찾는 일이 아닐까! 부지런한 루틴 업로드로 홈트를 지루할 틈 없게 해 주신 심으뜸 선생님에게 아낌없는 감사를 보낸다. 내년에도 꾸준히 운동하자. Keep Calm and Squat!


6. 커피 OUT

이제 몸을 효율적으로 잘 '나눠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은 정직해서 과소비하면 소진되고, 저축하면 유지된다. 장 건강은 폭음(?)하고 과식하던 20대 초반을 벗어나 술자리가 없는 직장에 다니면서 좋아졌다. 반면 위는 일을 시작하고 오히려 커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나름 나름의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작년에 결국 위경련으로 탈이 났다.

그 영향은 올해까지 이어졌다. 몇 주 연속 데이트 도중 체해 애인을 힘들게 하던 어느 날, 돌연 커피가 이런 피폐함을 감내하게 할 만큼 소중한가 하는 '현타'가 왔다. 커피를 끊겠다고 인스타그램에 공언했고 회사 사람들에게도 커피 마시는 모습이 발견되면 때려달라고 과감히 선포했다. 동료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큰 도움을 주었다.

커피 없는 삶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피곤하지 않았으며, 온전히 내 에너지가 닿는 데까지만 힘을 쓰게 했다. 내 몸 앞에 정직해지게 만들었달까. 피곤하면 커피를 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 쉬어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우쳐 줬다. 커피 없이도 그날의 to-do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건강한 체중 감량과 더불어 '내 몸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7. 독서

작년쯤부터 책 읽기에 재미를 들여 올해는 나름의 다독을 했다. 세어보니 20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해였다. 과제 외에는 전혀 책을 읽지 않던 과거의 나에 비해 아주 장족의 발전이다.

올해의 책은 1.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2. 일하는 마음 (제현주) 3. 불안 (알랭 드 보통) 모두 '어떤 마음과 방향으로 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준 책들이다.  

올해 구입한 아이패드+맥북 조합은 독후감 쓰기를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줬다.

8. 애인

많이 지쳐있을 때 만나 더 감사한 애인. 올 한 해 단단하게 나의 고민들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듬직하게 안정감을 주고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 준 애인의 덕이 컸다. 감사하고, 행운이다.

 

9. 동료 H

오랜 시간 서로에게 준 영향이 차곡히 쌓여,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타인이 있다면 단연 소중한 사람이다. 올해 유독 그런 고마움을 많이 느낀 동료가 있다. 아주 날 것의 상태로 만나, 서로가 성장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동료. 둘 다 은근히 쑥스러움이 많아 고마움과 애틋함을 말로 잘하지는 못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전달되고 있음이 또 꽤나 자주 포착돼서 다시금 감사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가 짚어준 내가 자주 하는 말 "아끼다 똥 돼요"를 실천하여, 올해만큼은 이 지면으로 감사함을 아낌없이 꺼내본다. 항상 고맙습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오래 함께해요.


10. 광고

사내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광고 프로세스가 올해 드디어 체계화되었다. 마케터와 디자이너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광고물)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마케터에게는 소구점 전달 여부가, 디자이너에게는 시각적 조화가 우선순위가 높다. 인하우스로 광고를 진행한다면, 그리고 아직 광고 프로세스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스타트업이라면, 두 담당자가 각자의 생각을, 가치를, 작업 방식과 순서를 서로에게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듣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어렵지만 필수적인 프로세스.

올해 소구점 리스트업 - 소구점 선택 - 컨셉 논의 - 카피 작업 - 1차 제작 - 피드백 - 2차 제작 - 피드백 - 완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광고 프로세스가 정착되었다. 얼마 전 2020년 광고팀 회고 회의를 하며 올해 입사하신 영상 디자이너님이, 입사 당시와 지금의 해피문데이 광고물은 다른 회사의 것 같다며 호탕히 웃던 모습에 올 한 해 '성취'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겼구나 싶어 기뻤다.


11. 글쓰기

개인적으로는 좋은 카피를 쓰기 위한 연습을 좀 더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프로덕트 마케터는 숙명적으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글쓰기에 능해야 하고, 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의 영역임을, 그리하여 많이 읽고, 밑줄을 긋고, 저장해 두고, 따라 써야 함을 인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 브런치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아직 성과는 진행 중이지만, 전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12. 인턴 S

해피문데이에 콜드 메일을 보내 엄청난 열정과 총기로 없던 인턴 자리를 만들어내더니 반년을 팀의 fresh eye, 행동가, 에너지로 활약하고 이제 곧 인턴 졸업을 앞둔 S. 왜 나는 대학생 때 진로에 대한 고민을 action으로 용기 있게 더 진척시키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열정적이던 그녀는, 마지막 사내 인터뷰에서 '여성 건강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진로의 일부로 생각해보게 되었다'라고 말해, 단순한 열정 그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었음을 보여주어 속으로 '역시!' 했다.

 

13. 조직

회사가 많이 커졌다. 연 초 10명에서 17명까지 커졌다. 열명 후반대부터가 스타트업 조직 내의 혼란이 가중되고 갈등이 늘어나는 시기라고들 한다. 40명에서 50명과, 10명에서 20명은 느껴지는 차이가 크다.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수가 달라지고, 내가 관여하지 않는 일들이 많아지며, 자발의 영역에서 행해지던 것들에 관리의 어려움이 생긴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 회사 차원에서 top to bottom으로 조직도를 개편했다. 이와 함께 공간을 꾸려가는 문화와 규칙들은 TF를 꾸려 bottom to top으로 만들어 올해 말 전사적으로 공유되었다. 이 두 과정 모두에서 모든 팀원들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되었다. 조직도는 팀원 모두의 피드백을 거쳐 수차례의 시안을 거쳐 탄생했으며, TF팀은 사내 설문조사로 모두의 의견을 수합해 실제로 대부분을 반영하고, 반영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유를 매주 전체회의에서 공유해 주었다. 건강한 조직을 만드는 치트키는 없지만, 단 하나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진 변인을 꼽는다면 '소통'일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혼란을 줄이고 개인의 능력치를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의 개편된 조직구조, 한 사람 한 사람의 강점과 매력이 만드는 시너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와 규칙과 함께하는 2021년의 회사의 모습이 기대된다.

대표님의 조직도 공유 PPT. 꾸밈없지만 본질은 명확하게. 발표자를 닮았다.




<일하는 마음>에서 저자 제현주는 '편집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에 대한 편집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고.

편집은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는 연속성 있는 자신을 만든다. 내가 살아있다는 충분한 감각을 깨운다. 자신의 한 해를 편집하는 시간을, 그리하여 내년의 자신에 대한 복선을 깔아 두는 시간을 넉넉히 갖자.


12월 초부터 하나씩 모아본 2021년에 대한 기대의 조각들로 2020 회고를 마쳐본다.


1.  내가 가진 예민함을 주변에 벽을 치기 위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자.

2. 몰입하는 한 해를 보내자. 몰입의 깊이감은 성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3. 내 안의 교복 입은 아이를 없애자. 나는 칭찬과 평가, 그 이상을 위해 일한다.  

4.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 어리석다.

5. 타이밍이 정해진 '사람의 일' 앞에 스스로를 착취하지 않되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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