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꼬꼬마 팀장의 심중 소회
컬리와 로켓배송을 그만두고 일주일에 1-2번 직접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주말에 사람 많은 마트가 싫었고, 무거운 짐을 들고 집에 오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그때그때 필요한 물품을 1개라도 주문할 수 있는 컬리와 로켓배송으로 모든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매했었다.
다시 장을 보러 마트에 가기 시작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나를 더 바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여유롭고 또 그래서 행복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빈 시간은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이래야 하는데"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채워졌고, 이 생각들은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직장인이었던 나 보더 더 바빠져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비효율적으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종이에 적어두었다가 일주일에 1-2번 직접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밀키트와 사온 반찬대신 소스나 육수부터 직접 만든 음식으로 식탁을 채운다.
이렇게 집안일을 하다 한 가지 얻은 인사이트가 있었는데 냉장고를 관리하는 것과 리더로서 팀을 운영하고 지원하는 것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 + 재료들로 할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해 보고 한 끼니를 채운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고 한들 하나의 재료로만 꽉 차있는 냉장고는 쓸모도 매력도 없다. 마법의 재료 같은 투뿔 한우로 가득 찬 냉장고가 있다고 해보자. 물론 처음엔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곁들여 먹을 야채하나 없는 스테이크를 얼마나 오랫동안 먹을 수 있을까? 고기도, 야채도 그리고 밥 먹은 뒤에 먹을 후식까지 골고루 채워져 있는 냉장고가 훨씬 쓸모가 많다.
팀도 그렇다. 나의 약점을 채워줄 강점을 갖고 있는 동료가 있어야 하고,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봐줄 수 있는 동료가 있어야 팀 내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다. 뾰족뾰족한 강점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을 세우고 있어야 추진력을 얻고 더욱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
하루 한날 사온 재료들이라고 하더라도 소비 기한은 제각각이다.
쓰인 소비 기한만 믿고 있어도 안되고, 재료마다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냉장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상하진 않았는지, 더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다른 곳에 두는 게 좋은지 신경 쓰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표고버섯을 사두고 처음 사온 비닐 그대로 보관하면 물기가 생겨 일주일도 안되어 곰팡이가 슬지만, 플라스틱 통에 키친타월을 깔아 두고 보관하면 적어도 3주는 신선하게 먹을 수 있다. 각각의 재료들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방법을 고민하고 제때 꺼내어 요리를 해야 한다.
팀장으로 근무했을 때, 평가 시즌이 다되어서 평가 결과만을 전달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가를 6개월 앞둔 시점에 "소원을 말해봐"라는 시간을 운영했었다. 1:1 면담 형태로 팀원 한 명 한 명과 다음 평가에는 어떤 성과를 이루고 싶고 이를 통해서 어떤 평가를 받고 싶은지 공유하는 시간이었는데, 기대하는 성과와 평가 결과를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으로 준비했었다. 이 세션을 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었는데 예상 밖의 피드백을 받았다. 면담을 통해서 팀원 모두가 평소에도 더 자주 이런 의도된 1:1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맡았던 팀은 규모가 크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1:1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또 매일같이 데일리 미팅을 진행했기 때문에 팀원들이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고 느낄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퍼포먼스를 잘 낼 수 있는지, 현재 워크로드가 과중해 지친 상태는 아닌지 의도적인 만남과 질문이 필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들여다본 냉장고 구석에서 찾은 아끼던 재료의 소비 기한이 지나 깜짝 놀라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냉장고 속 작은 재료 하나도 메인 재료로서 맛있고 멋들어진 음식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레시피에 (생략가능)이라고 적혀 있는 재료들로도 메인 재료로 충분히 요리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그건 요리하는 나의 실력과 곁들이는 소스에 달려있는 것이다.
다시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주재료와 부재료를 구분해서 마련해 두었다. 차돌박이, 등갈비, 닭볶음탕용 닭과 곁들이는 채소들로 냉장고를 채워두고 요리를 했었다. 지금은 냉장고 속 재료들을 살펴보고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떠올려 한 끼니를 채우곤 한다. 버섯을 굴소스에 볶아 덮밥을 만들기도 하고 콩나물과 무 만으로 국을 끓여내기도 한다. 요리를 해보면 알겠지만 갖은 소스를 넣어 볶아낸 제육볶음보다 들기름과 소금만으로 간을 하는 나물을 맛있게 만드는데 더 큰 내공이 필요하다.
강점이 명확하고 본인을 빛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색내는 것 없이 조용히 본인의 자리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퍼포먼스는 본인을 잘 드러내는가 와는 별개의 문제인데도 후자인 경우 성과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 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를 맡을 때에도 하나의 프로젝트에 함께 투입될 때에도 “여기서 이런 업무를 하면 이 결과물을 내 성과로 가져갈 수 있겠지?” 와 같은 계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리더십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경쟁 구도 안에서 살아남는 사람만 함께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그게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런 계산하지 않는 인재들이야말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밥그릇 자기가 챙겨야지라고 다그치기보다는 내가 내공 있는 요리사가 되어 적절한 레시피로 숨겨진 맛을 이끌어내 줄 소스를 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소형 냉장고도 유지하고 관리하기 버거울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영업용 대형 냉장고도 좁게 느껴질 수 있는데. 리드의 역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공을 들이고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팀을 포함한 모든 조직은 조직장(리드)의 생각의 크기만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한계는 아니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뾰족함을 만났을 때 그만큼의 여유를 내어 유연하게 대응하느냐 혹은 그걸 잘라내느냐에 따라 팀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결정되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쓸데없는 생각을 덜기 위한 집안일이 또 다른 생각의 시작이 된 것 같다. 적어도 이건 글 한편 작성할 쓸모 있는 인사이트를 주었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