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 마르코복음 9장 8-10절.
그들은 잠시 황홀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 5절)하고 말했던 것이다.
복음은 여기에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 9장 6절)
사실 복음서의 이 단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분명 5절과 6절도, 8절부터 10절까지의 구절도 아니고
중간에 빠트린 7절일 것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마르코복음 9장 7절)
성경학자가 아닌 성경 독자로서
하지만 내가 매료된 구절은
저기 6절이다.
그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들은 남이 아니라 항상 곁에서 지낸 제자들인데.
그는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공인된 수제자였는데.
압도하는 체험은 공포와 구분하기 어렵다.
숭고는 미와 근본적으로 다른 체험이다.
그것은 ‘아, 아름답구나!’ 하고 알아보는 체험이 아니라
도무지 알 수 없는 체험,
감히 알려는 욕망조차 일어나지 않는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닥뜨려 솟구치는 체험이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느끼는 나 자신을 솟구쳐 오르게 한다,
고양(高揚)시킨다.
앎이 아니라
모름이, 알 수 없음이 우리를 추켜 올린다.
[넘어진] 우리를 일으킨다.
[눈먼] 우리를 이끈다.
[벙어리] 우리를 입 열게 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어도
내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여도
입을 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참된 말이 아니어서
다음 이어지는 신명(神命)은 마땅하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다.
여기에는 작은 단서(但書)가 붙는데,
이 단서가 바로 단서(端緖)다.
사람의 아들은 누구이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명을 받들어 지켰지만,
그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은 함구(緘口)의 서약을 깨는 게 아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서로 묻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무언가를 경험한 이들끼리
그들은 무지의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이 알지 못한 채 나누는 대화,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들은 이 최선을 다한다.
부질없는 최선.
결코 답에 이를 리 없는 최선.
그런데,
이게 맞다.
이게 좋다.
그들은 진공을 거짓으로 덮을 수 없는 사이끼리
“서로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진공을 가짜로 채우는 대신
고스란히 견뎠으며
이 무지의 대화는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있음을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음을
거듭 강하게 확인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진공 안에 지켜진다.
침묵은
세상에 대해 소리 없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거짓 답을 주지 않는 행위다.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는 것,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저 말을 알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분명히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계속해서 알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자각하게 하는 진언(眞言)이지 않은가.
이 만트라 위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가 닿을 수 없는 데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보았으되 알지 못하며
만났으되 아직 떨어져 있다.
그들은 이 거리를 아득하게 느끼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더욱 깊이 새기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사는 일이 벌어지고서야
이 ‘올바른 때’에 이르러서야
이해-하기를-시작한다.
그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면서야 풀릴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지혜로 풀 수 없다.
이제 알고 나서도
인간의 말로는, 어떤 언어로도,
인지(人智, Anthroposophy)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신지(神智, Theosophy)는 그런 법이다.
다름 아닌 그래서 신지라고 하는 것이니까.
그들은 오류로부터 보호받았다.
침묵의 약속, 함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신지에 초대받았다.
인지로 오염시키지 않음으로써.
이 이상한 일,
알지 못함으로써만 알게 되는 일.
그리스도교가 사순절 내내 잠겨 들고
파스카 성삼일 동안 짙게 맛보는
가르침이다.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다른 모든 것은 배움 앞에 놓이지만
이는 주어지는 가르침일 뿐,
인지로는 알 길 없는
신지다.
믿는다는 건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는 걸 포기하는 것이며,
결국 알기 위해 모르는 것이다.
또한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알기를 포기하지 않는 진정으로
이것이 진심이고, 하여 진실함을 드러내는 법이다.
게으르게 믿지 말고
차라리 열렬하게 의심할 것,
성심성의껏 모르지만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물어보았다”고 돌아볼 수 있는 축복을 빈다.
우리는 모르지만
복되게 모른다.
아무 무지나 찬양하는 게 아니다.
아무 믿음이나 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걸 다하고서야,
거듭 다시 도전하고 묻고 궁리하기를 다하면서야
무언가 믿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앎을 선취(先取)한다.
사순절은
그 숙고, 아니, 생각을 끊는 깊이 잠겨듦에 의하여
‘은혜로운 때’가 되지 않는가.
休
*다시 살아날 때까지:
부활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실 성경 원어(헬라어, 코이네)는 "살아난다"고 쓰지 않고
"일으켜진다"고 쓰고 있다.
'신적수동태'라는 신약성경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주어를 나타내지 않고, 분명 주체가 일어나는 것을 누군가/무언가에 의해 '일으켜진다'고 수동태를 사용함으로써
행위의 주체가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문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