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랍비, 잡수십시오. 하며 음식을 권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께
“랍비, 잡수십시오” 하며
음식을 권하였다.*
우리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웃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향하여 있다.
우리는 머뭇대면서도 갈망하고
좋은 원의를 갖는다.
여기까지는 흔하다.
우리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시받는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거나
때로 징조는 ‘거부’를 뜻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에게는
그대들이 모르는
먹을 것이 있습니다”
하시자**
하느님은 우리에게
감추시는 분 같다.
혹은 그 자신이
‘숨어계신 님’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의심의 말을 한다.
의심하는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니
의심은 더 커 간다.
우리는 우리의 전제를 당연시하며 말한다.
제자들은 서로
“잡수실 것을
갖다드린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하였다.***
물론 복음은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다음 구절을 잊고 생각해 보자.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생명을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마시지 않는 것
내가 먹지 않는 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결국 먹는 게 내가 되는 거니까.
거꾸로 거슬러
잡술 것을 드시라 하기 전으로 가 보자.
그때에도 우리는 의심하였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날 때마다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놀라고도
감히 묻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곁에 있었다.
이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분이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렇지만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혹은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하고 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물어야 한다.
사실 복음의 이어지는 구절은
제자들이 묻지 않고 저희끼리 수군거리는데
저희끼리 수군거리고 묻지 않는데
예수가 내처 대답해 주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나를 충족하는 것을 바랐고
나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를 배불릴 수 없고
목마름을 가시게 하지도 못하고
금세 다시 배고프다.
나는 충족되려 하였고
그러므로 충족되지 않았다.
거꾸로 나는
무엇을 충족하기를 바라는가?
나는 다른 이를, 누군가를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하였나?
무얼 하는지 알기나 하며
무얼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나 하였나?
채우기를 원하는, 채워 주기를 원한은
순수한 바람을 품기라도, 그런 이를 갖기라도 하였나?
그러지 않으면서
하나뿐인, 하늘처럼 가없고, 완전히 감싸는, 내가 온전히 그 일부인
하느-님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님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님이라 부르는 불일치는
나를 계속 궁핍하게 한다. 내 궁핍은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없다.
당신과 나는
남을 위해야 한다.
그냥 남이 아니라
나에게 분명한
너.
너를 필요로 한다.
너를 채움으로써만
그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채워진다.
일게 우리가 모르는 먹을 것이 아닐까?
다른 건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의 뜻은 무언가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언가요?
내가 하겠습니다.
그대가 너를 발견하기 바란다.
만나러 나가기를 바란다.
休
*200주년신약성서 요한복음 3장 31절
**200주년신약성서 요한복음 3장 32절
***200주년신약성서 요한복음 3장 33절
****200주년신약성서 요한 복음 3장 27절
*****200주년신약성서 요한복음 3장 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