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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Feb 20. 2024

광야로 간 까닭

— 어려움에 의지하여 살아가기



그리고 곧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냈다.

— 마르코복음 1장 12절(200주년신약성서)


대체 무슨 짓인가. 

이게 뭐하자는 건가. 


예수는 광야로 나간다. 

갈 길도 멀고 

할 일도 많고 바쁜데 

한가하게 뭔짓인가. 

이 고생이 뭐란 말인가. 


영이 하는 짓이 이 지랄이라고?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온 겨레가 외세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다. 

결탁한 세력, 이를테면 헤로데 왕, 따위는 한술 더 뜨는 지경이다. 

강제병합이나 식민 통치 경험을 가진 

지구상 숱한 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 


슈퍼 파워씩이나 갖고서는 

도피성 외유도 아니고 

생뚱맞게 광야행(曠野wilderness)? 


통탄일 일 

아니면 

짜증 팍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아니라고? 

눈앞이 캄캄하다. 


그 열렬한 애국지사 유다가 

똑똑해서 살림도 맡겼던 유다가 

오죽하면 

박차고 나가서 팔아버렸겠는가, 

차라리, 망하든지, 팍 엎는 기적을 보이든지 하란 거였을까? 


아무튼

예수는 광야로 간다. 


광야로 가는 까닭은 무언가. 

복잡할 거 없다. 

그냥 힘든 데 가는 거다. 

사서 고생하는 거다. 


무언가 그 안에 감추인 게 있을 거라 기대해선 안 된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진실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 가라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 

아무것도 없어야만 한다는 게 진실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많은 이들이 편지하고 물으면 

알뜰히도 답장을 해주었는데 

결코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대가 틀렸다는 말도 서슴치 않는 그는, 

그러나 아마도 편지한 이, 조언을 구한 이보다 더 깊이 

그의 처지에 잠겨 숙고하고 답하곤 하였다. 


그런 그의 편지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한 조언은 간단명료하다. 


“어려움에 의지해 살아가십시오.” 


릴케에 따르면 인생에서 믿고 의지할 건 어려움밖에 없다. 

그래서 무얼 해야 할지 빤히 알 때에야 고민할 것도 없겠지만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된다면 반드시 

어려운 쪽을, 

어려워서 꺼리는 그리로 선택해 

가라고 한다. 

그래야, 그래야만 바른 길로 간단다. 

그것만이 도움을 준단다. 



사순제1주일 복음을 선포한 뒤 

본당의 신부님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앞에 두고 담담히 말씀하신다. 

그걸 버리려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머무르려고 

광야에, 어려움 속에 가는 것”이라고. 

긴 말이 필요없다. 


릴케도, 

사제도, 

예수도 

다 안다. 


영에 이끌리면 다 안다. 

같은 영이 이끄니까. 


어려운 데로 가라.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라. 

고집스럽게, 아무리 떨어뜨리려 잡아당겨도 

지지 말고 인내하며 

의심없이, 틀림없이, 확고하게 

어려움 속에 머무르라. 

그뿐이다. 

달리 어쩔 수도 없고 

할 일도 없다. 



그러면 사건이 일어난다. 

무슨 일이? 

끔찍한 일이 

길고 길고 길고 길게 펼쳐진다. 





그분은 광야에 사십 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 마르코복음 1장 13절ㄱ(200주년신약성서) 


당신은 의심하고, 의심받고 

흔들리고, 흔들림당한다. 


이제껏 쌓아온 근사한 것들이 

생각이, 믿음이 부서진다. 

관계들이 부서진다. 

세계가 무너진다. 


바로 그러고서야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복음 1장 13절ㄴ(200주년신약성서) 



변화가 시작된다. 

당신이 의지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오직 온 정성을 다해서 

온힘을 다해서 

멈추었기에 

버티었기에 

견디어냈기에 


영의 의지가 활동한다. 

당신은 투명한 유리처럼 

사기꾼이 되지 않고 

진짜가 될 수 있다. 

비로소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한다. 


아직이다. 

때는 때다. 

때가 와야 한다. 


그래서 “요한이 잡힌 후에(마르코복음 1장 14절, 200주년신약성서) 예수는 나아가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는 여전히 사람의 아들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그는 비로소 말한다.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예수*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 마르코복음 1장 15절(200주년신약성서) 



회개란 무엇인가. 

바꾸는 거다. 

단지 metanoia, ‘돌이키다’ ‘방향을 바꾸다’는 말이다. 

일상에 쓰던 이 말이 두고두고 

신비로운 해석에 감싸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방식을 바꾸는 것, 

그것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해를 볼 것인가, 

해를 등질 것인가. 


세상을 볼 것인가, 

세상을 등질 것인가. 



한데 먼저 

광야로 가라. 

바람소리뿐 아무것도 없는 데로. 

기댈 것도 숨을 것도 숨길 것도 없는 데서 

당신은 헐벗고 

벌거벗으라.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까지 견디어라. 


그런 다음에 당신은 온전히 자기일 것이고, 

온전히 자기인 당신이 하는 전부가 

믿을 만한 것, 진실일 것이다. 

참되니, 

무지를 뛰어넘어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꿰뚫으면 

해를 마주친다 이 말이다.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나도 당신에게 그럴 수 있도록 

광야로 가서 

머물리라. 

벗어나려고 가는 게 아니라 

거기 다른 게 숨어서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야 

절대로 있는 것을 마주할 것이기에 

그에 사로잡힐 수 있기에 


은신할 수 없는 데서 

은닉하지 못하고 

들키기 위해, 

잡히기 위해 가는 거다. 


잡혀라, 그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명은 동격의 호칭이 아니다

그것은 문장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즉,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 

“예수는 그리스도인데,”라는 구절이다. 이어지는 문장들과 합해서 

이어지는 문장들, 자신이 안긴 문장에 힘을 주는 

안은 문장에 진리성과 힘을 부여하는 안긴 문장이다. 

이 안긴 문장, “예수는 그리스도인데” 어쩌구로 이어지는 문형은 

한 가지 중대한 사항을 시사한다. 


당신이 같은 영을 따라 

같이 행동한다면 

당신의 발자취에 의거해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그니는 그리스도인데 말이지, 그가” 어쩌구 저쩌구. 

할 거라는 것. 

그것이 정당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거라는 것을. 


범신론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에로 초대받았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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