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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Jan 01. 2022

리셋할 수 없는 인생이라 다행이야

<이터널선샤인>

속초를 다녀왔다. 부모님이 먼저 여행으로 내려가 있으셔서 나도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다. 명목은 가족여행이지만 나는 딱히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고, 바닷바람이나 한번 쐬고 카페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출발하는 날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침부터 패딩의 지퍼가 고장 나서 옷을 갈아입다가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놓쳤다. 기존에 예매한 표를 취소하고, 다음 차를 예매한 뒤 터미널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으나 뭘 먹을까 고민하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 결국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내가 앉아야 할 12번 좌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여기 자리 맞으세요?”하고 물었고 그 사람은 12번이 맞는다고 대답했다. 맥북과 아이패드 그리고 각종 충전기가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이 나를 자꾸만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것 같았고 등에선 식은땀이 났다. 승차권을 확인하니 그 버스는 10시 20분 출발이었고 내가 예매한 버스는 10시 30분 출발이었다.


어찌 됐든 무사히 버스에 몸을 실었다.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던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이 훌쩍 넘었다. 원래 점심 메뉴로 생선구이 정식을 먹기로 했다가 내가 패딩을 갈아입는 나비효과로 인해 간단하게 장칼국수를 먹게 됐다. 오후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대기가 다섯 팀이나 있었다. 짜증의 한계치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밥을 먹고 나니 거의 3시가 다 된 시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내가 한 거라곤 버스를 탄 것과 겨우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엄마아빠는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느라 아침을 먹고 카페에 계속 있다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거여서 밥을 다 먹고 다시 카페로 가지 않고, 일단 숙소로 돌아왔다. 28층 스카이라운지에 카페가 있다고 해서 거기서 작업을 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먼저 스카이라운지로 갔는데 수요일은 휴무라는 것이다. 게다가 도착한 숙소의 엘리베이터는 한 번 타려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내 남은 인내심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왔고,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기로 했는데 이번엔 아빠가 갑자기 피곤해서 30분만 누워야겠다고 했다. 내 짜증의 임계선이 무너졌다. 시계는 어느덧 저녁 시간을 향해갔다. 나는 어디로 간다고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가방을 들고 무작정 나와버렸다. 걷다 보니 작은 동네 카페가 나와서 들어갔다. 카페는 일관되지 않은 게 일관된 정신 산만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신나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역시나 일을 할 순 없었다. 이 모든 게 서러워져서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저녁에 몇 시까지 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는 몇 시에 있는지 알아봤다. 이미 상상 속의 나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집으로 가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상상만으로 마음이 편하고 통쾌했느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감정은 찰나 같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기억에서 지웠다는 사실을 알고 홧김에 기억을 지우기로 마음먹은 조엘이 나와 같지 않았을까. 사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을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순간의 서운함과 화에 못 이겨 라쿠나 회사를 찾아간 조엘.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면서 클레멘타인이 왜 싫어졌는지 이야기했지만 그건 자기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했지만 조엘은 기억을 삭제당하는 중간에 무의식 속에서 깨어나 클레멘타인과 함께였던 시간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이 모든 걸 취소해달라고 울며 외친다.


만약 내가 상한 기분에 충동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면 엄마아빠와 함께 킹크랩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도 마시지 못했을 것이고, 사장님과 영감을 나누는 대화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영감을 얻고 난 동력으로 작업도 못했을 거다. 파도가 거센 겨울 바다도 못 봤을 것이고, 엄마와 함께 쌓인 눈에 푹푹 빠지며 눈오리를 만들지도 못했을 거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것도. 그날 욱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면 서울로 가는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차를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을 테니 불편한 마음을 끌어안고 집에서 혼자 더 우울의 수렁에 빠졌을 것 같다. 속초에 온 결정을 리셋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고, 쉽게 기억을 지울 수 있는 회사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있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기억을 지워서 나중엔 어떤 게 진짜 내 기억인지 조차 모르게 될 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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