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다. 그렇다면 실존하는 나는 이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실존주의자가 답해야 할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실존주의자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동안 실존주의자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남 탓하지 않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선택하며 그 선택한 것은 곧 자신의 삶의 내용이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서 삶의 선택을 해줄 수 없다. 신이나 미리 결정된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당신의 삶은 오로지 실존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이에 대해 실존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자신이 정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권리가 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이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자는 자기실현을 위해 자신이 행사한 선택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진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데 그로 인해 수반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바로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신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운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부모, 어른들, 친구, 나라, 시스템, 전쟁, 사회의 부조리도 탓하지 않는다.
그는 그를 둘러싼 어떠한 주위 환경 탓을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탓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존하는 자기 자신의 모든 선택과 그 모든 결과에 대해 탓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남 탓하지 않을 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운명애(아모르 파티, amor fati)’를 실현할 수 있다.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의 내용처럼, 실존주의자는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탓하지 않고, 씁쓸한 맛, 단맛, 짠맛, 신맛, 감칠맛을 다 받아들인다. 그는 어떠한 본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고 그 본질에 의해 평가 받고 재단 받는 자가 아니다. 그저 그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실존주의자이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말이다. 뫼르소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내는 과정에서 전혀 슬픔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관조적인 태도만을 보일 뿐이다. 또한 그는 그의 여자친구 마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깊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여자친구는 그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묻지만, 그는 사랑이란 아무 의미 없는 것 이고 여자친구가 원하는 결혼이란 형식 또한 아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마치 그는 사회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진리와 도덕과 아름다움의 본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방랑하는 이방인이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그는 ‘사회부적응 아웃사이더’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어느 누구를 탓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를 탓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고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는 동네 사람 레몽과 엮이다 특별한 동기 없이 한 아랍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이후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과 판사는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진행한다. 보편적 본질과 결이 맞지 않는 뫼르소는 법정 안에서 조차 철저한 이방인이다. 그는 비인간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과거의 행동, 태도로 말미암아 참수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탄원도 항소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왜?’라는 본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회개하라는 부속 사제의 끈질긴 권유를 그는 모두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에 모든 감각과 의식을 집중시키며, 오로지 ‘나’로서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죽음에 가까이에 서게 되자, 그는 그 자신이 ‘전에도 옳았고 지금도 옳다’라는 것과 ‘전에도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에서 본질인 것, 하지만 뫼르소 관점에서 부조리인 것들 앞에서, 뫼르소는 조용하지만 철저한 반항을 해온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방인’이었지만 언제나 ‘자유인’이었다.
두 번째는 불안감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회사라는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다. 회사 근무 연수가 많아질수록 조직이 나에게 부여한 권한과 책임은 점점 더 커져갔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 한 가지 감정 또한 더욱더 자라났다. 그것은 바로 불안감이었다. 책임 이 없었을 시절에 나는 스스로 조직의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상급자가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나 대신 해주었고 나는 그 결정을 따르면 되었다. 상급자가 결정한 일이었고 결국 상급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었기에 나는 내가 수행한 일의 결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스스로 조직의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내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나에게뿐만 아니라 나의 팀원들과 협업 부서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나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다.
“이게 정말 최선인가?”
“이 결정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말한 대로 적기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와 협업 부서들에게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혹시 타격을 입는 것은아닐까?”
“팀원들은 나의 결정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일을 수행할 것인가?”
“나의 결정에 오류와 실수가 있지는 않을까?”
책임이 많아진 만큼 나는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고민이 많아진 만큼 불안감 또한 깊어졌다. 나의 작은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책임이 있는 곳에는 필연 불안감이 수반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이 던져진 실존주의자, 어떤 것이 옳고 좋은지 대신 결정해줄 존재 없이 홀로 선택하고 홀로 책임을 지는 실존주의자에게 불안감은 숙명과도 같다. 심지어 실존주의는 ‘인간이란 존재가 곧 불안’이라고도 말한다. 때로는 이 불안감은 우리에게 무겁고 버거운 것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우리를 공포에 빠뜨려 옴짝달싹 못하게하고 우리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하는 나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해보고 그 결과 최선이라 생각하는 선택을 과감히 할 수 있다.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의 불안을 ‘아브라함의 불안’이라고 불렀다. 성경의 창세기 22장에는 유대인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이었다. 유대인의 신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단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는 말을 던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을 데리고 제사를 하러 길을 떠났다. 그 아들은 길을 가던 중 아버지에게 도대체 제사에 바칠 양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신께서 알아서 준비하실 거다.”라고 말하며 아들과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 했다. 그 때 신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말렸다. 그는 가장 아끼는 것을 신에게 내어준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큰 복을 주겠다 약속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만약 당신이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땠을까?”를 묻는다. 신의 요구를 들은 그 순간부터 아들에게 칼을 겨눌 때까지 전전긍긍 갖가지 고민하며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자신에게 메시지를 던진 자가 정말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 맞는가? 혹시 악마는 아닐까? 좋은 신이라면 어찌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라
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망상인 것은 아닐까? 진짜 내가 아들을 바치려 한다면 신은 정말 가만히 있을 것인가? 등등 아브라함은 모든 가능성을 고민하며 불안에 빠졌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결국 그 불안 속에서 최종 선택을 하는자는 바로 아브라함이었다고 말이다. 우리 실존하는 인간은 자유로운 만큼 불안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불안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자유로부터 도피하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참여(engagement)’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앙가주망이라 부른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세상에 던져진 후 스스로 인생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처럼 실존적 자유를 토대로 자기 자신을 사회 속에 던지고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앙가주망’하라고 주장했다. 앙가주망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유와 선택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2011년 프랑스 소설가 알렉시 제니는 마흔여덟의 나이로 그의 첫 소설 《프랑스식 전쟁술(L’ Art français de la guerre)》을 출간했다.당시 그는 리옹의 예수회 재단이 운영하는 고등학교 생물 교사였다. 하지만 그는 분필을 던졌다. 그는 프랑스에서 쉬쉬대고 있었던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행해진 프랑스 군의 야만적 만행을 소설 속에서 고발했다. 세계 대전을 정산하려는 순간 프랑스는 역사의 한 자리를 잡기 위해 총체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프랑스는 침묵을 택했다. 알렉시 제니는 식민주의로 인한 타락과 결과에 대한 침묵이 프
랑스를 숨 막히게 하고 프랑스의 언어를 좀먹고 프랑스의 정신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제리에는 흑인인 프랑스인, 아랍인인 프랑스인, 황인종인 프랑스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2차세계 대전 중 독일군을 상대로 프랑스인의 붉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백인종이었고, 그리스 라틴 문화와 기독교를 믿는 프랑스인들뿐이었다.
알제리 사람들이 그들의 가슴에서 알제리 국기를 꺼내자 영혼 없는 프랑스식 전쟁 기계들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100만 명의 알제리인들이 죽었다. 알렉시 제니는 그 참혹성을 주인공 빅토리앵 살라뇽을 통해 생
생하게 묘사했다.
“피는 알제의 기울어진 거리로 폭포처럼 흘러내 려갔고, 분출하는 피들은 바다로 쏟아져 들어가 부패한 수면을 만들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바다는 붉은색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밤낮으로 총격당한 사람들, 칼에 찔린 사람들, 폭발로 인해 화상 입은 사람들이 오고, 복도에는 무장 경찰들이 항시 대기 하고, 병실 앞에는 기관총을 쏘고, 목을 자르고, 부상병들을 죽이고 있어.”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쏴대고 사람들은 자기 집 창 앞에서 지나가다 죽어. 누가 총을 쏘는지도 몰라. 그들은 심지어 누구를 향해 총을 쏘는지도 몰라. 그들은 얼굴을 보고 총을 쏴.”
그렇게 그는 프랑스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살렸다. 전쟁 없이 평화의 시기를 보내며 안위하고만 있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인종, 혈통, 종교 등 시간의 강물이 흐르면 희석되어버릴 차이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폭행하는 짓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를 알렸다.
한편, 적극적인 참여인 앙가주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오해들을 가지고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너 한 사람이 나선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왜 네가 그것을 해서 손해를감수해야 하는가?”
“그냥 모르는 척해라!”
“우리 사회는 딱 중간만 하면 된다!”
“너무 앞서 나가지도 너무 뒤쳐지지도 마라!”
이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앙가주망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앙가주망을 포기하고 언행불일치의 삶을 산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또 한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 있는 지성인이 아니기 때문 에 앙가주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그런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실존주의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실존주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버는 사람, 일억 원을 버는 사람, 십억 원을 버는 사람 모두 각자의 삶 속에 자유를 행사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실존자이다. 또한 실존주의는 앙가주망의 크기로 차별하지 않는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사장이든 알바생이든, 교수든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자영업자이든 각자의 삶 속에 맞는 앙가주망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실존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의 상황과 분수에 맞게 작은 앙가주망들을 실천하며 더 좋은 삶을 만들어보자. 어쩌면 이미 우리는 그러한 작은 앙가주망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작 유
<질문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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