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며, 실존하는 존재로서 그리고(타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노예가 아닌) 삶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던지고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이다.
앞서 본질주의 철학을 위한 질문으로 나는 거꾸로 육하원칙을 말했다. 그리고 나는 거꾸로 육하원칙 중에서 ‘왜?→어떻게?→무엇?’으로 연결된 세 가지 핵심 질문을 언급했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의 질문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탈본질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인식으로부터 철학하는 실존주의는 첫 질문으로 ‘왜?(본질)’가 아닌 ‘누가?(존재)’를 삼는다. ‘누가?’를 시작으로 ‘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의 순서로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즐기면 된다.
실존주의 철학의 질문은 우리가 육하원칙이라고 외우고 있는 순서와 동일하다. 나는 ‘거꾸로 육하원칙’과 구분하여 이를 ‘똑바로 육하원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똑바로 육하원칙 중에서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세 가지 질문은 ‘누가? → 무엇을? → 어떻게?’이다. 이를 자세히 알아보자.
1.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존재 중 오직 인간만이 하는 고민이 있다. 그것은 실존하는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의 고민이다. 이 고민은 대개 “꿈이 뭐야?”라는 질문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하지만 이 고민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가장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고민 중 하나이다. 꿈이란 말만 나와도 갑자기 말문이 막히며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청소년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이 현상은다 큰 성인에게도 동일한 것 같다.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은 왜 부담스러워할까? 나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본질주의 속에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원인이자 목적인 사회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수호 내지 숭배의 대상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즐기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돈을 축적하고 수호해야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다. 나이가 들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알수록, 돈은 단순한 교환의 매개체를 넘어 더욱더 보고 싶고, 더욱더 만지고 싶고, 더욱더 가지고 싶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그 존재를 원하는 대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백지와 같이 순수한 아이는 성인이 되는 동안 끊임없이 어른들로부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듣는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기준은 바로 돈이다. 아이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쪽으로 가려고 하면 어른은 은근슬쩍 그 앞길을 가로막거나 내밀었던 도움의 손길을 다시 거둔다. 그리고는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이기대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유인한다.
예를 들어 한 초등학생 아이가 있었다. 그의 꿈은 에버랜드 사육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에버랜드 사육사가 되겠다는 아이의 꿈에 관심과 응원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정말 생각보다 힘든 일일 텐데. 커다란 짐승들 똥과 오줌 치워야 하고! 부자가 되기도 어려울 텐데....”라며 그 아이의 꿈을 밟았다. 결국 자신의 꿈이 멋지지 않고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에버랜드 사육사가 되는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장래희망란에 이렇게 적었다. ‘외교관’. 그 아이가 바로 나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꿈을 타협한 사람에게 “비전을 가지세요! 꿈을 꾸세요!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사람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지운다. 한때 나는 그런 부류의 말들을 정말로 싫다고 느끼곤 했다. 그런 질문이 나를 두 번 좌절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매년 공동으로 초등생의 장래 희망을 조사한다고 한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최상위권(5위 이내)에 든 장래 희망은 바로 유튜브 크리에이터이다. 그런데 나는 이 현상에 대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유튜브 광고 수익으로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면 그래도 아이들은 장래 희망으로 크리에이터를 적어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려서부터 매년 장래 희망을 생활 기록부에 제출했다. 과연 그 장래 희망은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강요되었던 것이었을까? 내 뜻이었을까? 아니면 타인의 뜻이었을까?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본을 위한 것이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며, 실존하는 존재로서 그리고(타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노예가 아닌) 삶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던지고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이다. 이 질문은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과학자와 같은 직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당신이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한 결과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기로 선택했고 바로 그것이 그 이후 당신의 행동과 결정에 선행하는 원인이자 목적이 된다. 이 질문에 답한 결과,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 가능한 어느한 사람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나는 __ 이다.
의 빈칸에 당신이 되고 싶은 존재를 써넣는 것이다. 단, 그 답을 내리는 자는 오직 당신뿐이어야 한다. 앞서 머리말에서 언급한 경력직 채용 면접관 네 분의 임원 중 두 분과 함께 나는 입사 후 일 년 뒤 저녁 식사를 했다. 한 분이 나에게 물었다. “회사에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그와 비슷한 질문에 대해서 이미 깊이 있게 고민해봤던 터라 이렇게 바로 답했다. “저는 경영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은 제가 대표이사가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작은 조직을 맡든지 큰 조직을 맡든지 저는 경영자의 마음으로 일할 것이고, 회사에서 제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경영 원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나는 이윤 창출과 실적이 최우선인 본질주의 시스템 속에서 ‘나는 경영자이다!’라는 실존주의적 답을 내렸다. 이후 회사 생활을 하며 항상 나 자신은 경영자이며 경영자로서의 행동을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빨리 부장이 되어야지!” “기필코 임원이 되겠다!”는 생각에 난 관심이 없었다. 또한 나는 평가 결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자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경영이란 방향과 방법을 이끄는 것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직급 무관, 담당 인원수 무관, 경영자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조직 속에서 방향과 방법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내게 맡겨지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도 “나라면 어떤 방향으로 갔겠는가?” “나라면 어떤 방법을 택했겠는가?”를 물으며 경영을 훈련했다. 그 결과 회사는 나에게 단순 노동을 교환하여 돈을 버는 곳을 너머 내 인생 교육장으로 느껴졌다.
나는 ___이다. 당신은 빈칸에 수만 가지의 가능성을 쓸 수 있다. 당신의 존재 속에 감춰진 무한한 가능성을 정의해보라.
“나는 축복받은 자이다.” “나는 영혼의 부자이다.” “나는 음악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창조적인 자이다.” “나는 정직이다.” “나는강한 신념이다.” “나는 긍정적인 자이다.” “나는 열정가이다.” “나는재능꾼이다.” “나는 리더이다.” “나는 글로 세상을 만드는 자이다.” “나는 무(無)이다.” “나는 바위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은혜입은 자이다”
당신이 적은 그대로 당신은 그 존재로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기로 선택하겠는가?
<다음 화에서 계속>
아이작 유
<질문의 기술> 중에서
읽으시면서 떠오른 생각이나 다른 관점이 있다면, 댓글로 살짝 나눠주세요.
누군가의 한마디에서 또 다른 생각이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이 브런치 공간이 생각이 오가고, 서로의 시선이 스치는 장이 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