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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의미.

by 아이작 유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고 믿었다.


‘실존주의’의 어원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다. 실존주의를 영어로 하면

‘EXISTentialism’이다. 이 말을 시작하는 단어 ‘EXIST(존재하다)’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이에 우리는 실존주의가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 ‘EXIST’라는 말을 두 개로 쪼개면 ‘EX’와 ‘IST’로 나뉘어 진다. ‘EX’는 탈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IST’는 본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보편, 본질의 틀에서 해방되어 진짜의 나를 발견하고 개별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에 대해 ‘존재가 본질보다 우선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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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대중 강연에서 자주 종이를 자르는 칼을 예로 들었다. 종이 자르는 칼은 공구 제작자가 미리 목적을 정해 놓은 사물이다. 그 칼이 존재하기 전에 종이를 자른다는 본질이 있었고, 공구 제작자는 그 본질을 따라 칼을 만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들은 대개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 사물이 본질(목적)을 따르지 않는다면, 즉 쓸모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물은 버려지고 본질을 제대로 따르는 새로운 사물로 대체될 것이다(또는 고쳐져서 원래의 본질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이렇게 사물을 대하듯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쓸모없다고 사람을 폐기하거나 고쳐 쓸 수 있는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인간은 고쳐 쓰는 대상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가르쳐서 인도해야 하는 대상임을 믿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본질주의적으로 다뤄져 왔다. 사람들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신은 특별한 본질을 바탕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보다 본질이 중요하다고 여겨졌고, 경우에 따라서 그 특별한 본질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이단 또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1차 세계 대전의 경우 대부분의 전선에서 지옥의 참호전이 이어졌는데, 병사들은 흙바닥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4년 동안 한여름과 한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참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그 안에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병사들은 죽으면 즉시 다른 병사들로 대체되었다. 참호 속에는 온갖 배설물들과 죽은 병사의 시체들이 쌓여 마치 지옥의 모습을 연상시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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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의 존재보다 본질이 선행할까?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가 그 어떠한 본질에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쓰임새, 목적, 본성, 운명 따위의 본질 없이 먼저 세상에 태어난 뒤(존재),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본질)고 주장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미리 정해진 목적과 방향이 없으며, 자신을 대신해서 살아줄 다른 존재도 없다. 인생의 문제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이를 대신 결정해 줄 신이나 운명은 없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라고 믿었다.


실존주의 철학에 있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현실 세계 안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자유 의지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그 어떠한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당신은 당신이 원한다면 작가가 되어 글을 쓸 수 있고, 생명공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박

사 학위 과정을 밟을 수 있다. 당신은 매주 작품을 연재하는 웹툰 작가가 될 수 있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창의적으로 해설하는 큐레이터가 될 수 있다. 당신은 벤처 기업 투자가가 될 수 있고, 직접 개발한 앱으로 벤처 기업을 창업할 수 있다. 당신은 골프 선수가 되겠다 결심하여 매일 여덟 시간 훈련할 수 있고, 골프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루는 골프 잡지의 편집장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이 내린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한 삶의 내용과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삶,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자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실존주의자에게 자유는 숙명이다. 그 누구도 자유를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좋든지 싫든지 간에 우리는 자유의지로 선택을 해야만하며 결과에 변명하지 않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해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고까지 말한다. 때때로 그 자유의 형벌이 우리를 고독하고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며, 때때로 그 형벌이 가혹해서 우리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는 자유가 운명이듯 자유로 인한 불안 또한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실존주의자는 불안함이 자기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진 참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고, 자신의 한계와 결함을 극복할 용기를 얻게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자들은 치열한 낙관주의자이다.



아이작 유

<질문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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