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상처받았을 때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그 가운데 착한 사람들을 아주 좋아한다.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많이들 물어본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에는 정말 말 그대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도 있고, 예의 바른 사람도 있고, 무지무지하게 성실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먹은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기도 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가. 그런 세상에서는 사람들과 마주 치는 것도 싫을 것이다.
딱 부러지게 저 사람 착하다, 착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선한 느낌 같은 게 느껴진다. 순전히 느낌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눈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럼 한 번도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지 않았을까. 아니 수도 없이 당했고 앞으로도 배신당하고 이용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인생이 버거울 때가 있다. 인생이라는 게 나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만 잘한다고 해서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망 안에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내가 일을 망칠 수도 있고, 반대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일들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협력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완성될 수 없다.
그럼 관계망에서 벗어나면 될까? 《미움 받을 용기》에서 아들러가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런저런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살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인간관계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제자에게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 그것도 믿었던 제자에게 말이다. 심지어 내가 음식을 만들어서 바리바리 싸 들고 군대 면회까지 간 제자다. 그런 일을 한 번 겪으면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크다. 이런 마음의 상처는 몸도 힘들게 만든다. 내 꼴이 한없이 우습고 처량해 보였다. 제자에게 사기당한 선생이라니.
제자의 얼굴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어떤 순간에는 시간은 약이 아닌 쥐약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모멸감, 자괴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쉽게 잊히지 않고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큰일을 낼 것 같아서 제자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먼저 휴대전화에 저장된 제자의 연락처와 SNS를 모두 삭제했다. 내 일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역시나 시간은 약이 되어 돌아왔다.
어느 날 제자에게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연발했다. 그 순간 나는 용서보다는 시간을 선택했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구나. 나중에 보자.”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배신당하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는 한다. 게다가 내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더욱 그렇다. 한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겠지만 마음 한구석에 고이 놔두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급하게 마음에 없는 용서를 하게 되면 내 마음을 짓눌러서 나를 힘들게 만든다. 그런 용서라면 안 하는 것이 백번 낫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듣거나 그 사람을 떠올려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까지 그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배신감, 모멸감은 시간에 맡기고 내 일상으로 돌아와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럼에도 나는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좋아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그저 사람이 좋고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연결 고리가 되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