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경호 Nov 17. 2019

여행, 그리고 여행





여행은 망각을 위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찾게 되면 나는 모두 잊어버려요. 처음엔 두통이 사라집니다. 오른쪽 이마 근처에 불쑥 튀어나온 힘줄이 있는데 그곳으로부터 늘 두통이 찾아오거든요. 지끈, 또 불쑥 지끈! 어쩌다 통증이 턱관절까지 이어져 상당히 시달리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몸이 먼저 아나 봐요. 그곳을 찾으면 아프지가 않아요. 그래서 머리를 짓누르며 아파할 일도, 잠 못 들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죠. 그러나 이건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것이기도 해서 돌아온 후에야 '아! 한 번도 통증을 느끼지 않았구나.' 깨닫곤 합니다. 머리는 어리석어서 늘 이렇게 늦죠.


그리고 잊게 되는 건 날짜입니다. 이건 무감각해지는 것에 가깝겠네요. 바쁘게 살다 보면 잊게 되는 것 또한 날짜죠. 그런데 조금 달라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물어볼 필요가 없거든요. 그럴 필요도, 생각도 나지 않아요. 누군가 말을 하면 '아- 그렇구나.' 여길 뿐이에요. 그리곤 잊어버리죠. 누군가 날짜를 물어온다면 또 멈칫하게 될 거에요.


그렇게 잊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무얼 하며 살았었는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었는지, 생각나지 않는 거죠. 힘겹게 떠올려보면 그건 통증보다- 날짜보다- 더욱 낯설게 다가옵니다. 과연 내 기억이 맞는 것일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고요. 그건 무척 기분 좋은 낯섦입니다. 낯설어지는 만큼 새로운 공간에 더욱 물들어가는 것일 테니까요.









망각으로 비워낸 자리엔 새로운 습관이 자리 잡습니다. 새로운 생각도 자리 잡죠. 그건 새로운 내가 된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를테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차 한잔을 기울이게 된다든지, 지나가는 누군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든지, 눈을 보고 말하게 된다든지, 하는 것들이죠. 대체로 늘 원해왔지만, 관성을 깨지 못해 멀리 있던 것들이에요. 그래서 조금은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여전히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게 되기도 합니다. 담장의 넝쿨이라든지 헌 신발의 주름들, 그 주름 사이사이에 맺힌 꾀죄죄함 까지도 한참 바라봅니다. 달그락거리는 냄비의 허리에 박힌 그을음, 불어오는 바람과 그것에 몸을 맡긴 빨래의 움직임도 말이죠.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밥을 먹기도 하고 '세상에 이렇게 유쾌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잠시 섞여 있기도 해요. 사소한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재밌고, 당신의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흐뭇해집니다.









여행을 떠난 순간에도 늘 그런 공간을 갈망합니다. 여행이 한 번 더 여행을 만드는 거죠. 뚜껑을 열고 또 열어야 하는 러시아 인형처럼 말이에요. 여행을 꿈꾸는 것은 그렇게 끝이 없는 일인가 봐요. 여행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도시를 여행하고 거리를 여행하고 또 사람을 여행해야죠. 당신을 여행하고 나를 여행해야 해요.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게도 되었어요.


여행 속에서 여행을 꿈꾸는 이 사치스러운 마음이 무척 투명하게 여겨집니다. 여행 속에서 일상을 만나고 다시 설렌 여행을 꿈꾸고, 일상에서 여행을 만나 일상을 그리워하고, 그렇게 일상을 여행으로 만들고 때론 여행을 일상으로 만들고 싶어요. 일상을 잊으면 여행은 일상이 될 거에요. 또 잊으면 그건 여행이 되겠죠. 돌아오면 일상이 되지만 또 돌아오면 여행이 되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음, 그러니까. 나도 헷갈리고 싶은 거에요. 이게 여행인지 일상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분명 제대로 살고 있는 걸 거에요.


아, 지금 머리가 아픈 걸 보니 이건 분명 일상이긴 하네요. 하지만 오래가지 않길 바랍니다. 다 잊어도 당신은 잊지 않을 것을 알기에, 또 한 번 잊기를 원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담장 안의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