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다가 외워질 이름이여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는 따뜻한 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내 중심에 이곳으로 천도한 바흐탕 고르가살리 왕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는 사슴이 온천수에 상처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이 도시에 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번 조지아 여행에서 숙소 옆 유서 깊은 유황온천 아바노투바니(Abanotubani)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조지아는 생수로 유명한 보르조미 광천수뿐만 아니라 곳곳에 즐길만한 유황온천이 있다.
조지아 여행을 앞두고 비행기표는 셀프발권 한다. 목적지는 트빌리시 국제공항이다. 영문 이름과 성을 바꿔 쓰지 않도록 몇 번을 확인한다. 헷갈리게 알마티공항을 경유한다고 하니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이번엔 지난여름 일본행 비행기 예매표 날려버릴 때처럼 실수할 순 없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은 셀프 발권은 처음이 아니다. 제주도행 비행기는 최저가 검색하여 수시로 예매해 봤다. 그런 자신감과 나태함이 일본행 발권 때 실수하게 만들었나 보다. 제주도는 여권이 필요 없으니 쉬웠던 것이다. 운 좋게 합류한 후지산뷰 캠핑여행에 각자 비행기표를 끊기로 했다. 어린 동생들은 유심이니 뭐니 매끄럽게 잘도 처리하고 있어서 선뜻 물어보기 힘들었다. 내가 저렴한 가격에 확보한 항공권은 여권과 달리 적은 영문 이름 때문에 취소되었다. 수하물 부치다 알게 되어 가까스로 좌석은 확보했지만 비싼 가격을 주고 타야 했다. 여행은 즐거웠고 큰 금액이 아니라 잊어버렸지만 이번엔 다르다. 비행기표를 비롯해 공동경비로 지불한 금액이 수백만 원이라 실수하면 안 된다.
조지아 여행 떠나기 전 사전모임에서 알게 된 분들 중에 여행고수가 많다. 연배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고 영어가 아주 능숙한 편이 아닌데 나 홀로 여행 경험을 갖고 있다.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매력적인 선배님들이다. 그분들에게 종이항공권을 출력하여 실수는 없는지 물어보고 이런저런 정보도 공유한다. 몇 분이 조지아 트빌리시 공항으로 바로 오지 않고 카자흐스탄 알마티나 카타르 도하를 경유하여 온단다. 세계를 옆 동네처럼 누비는 그들의 겁없음에 놀랐고 낯선 단어 트빌리시를 아무렇지 않게 발음하는 것도 새로웠다.
보통 영어나 한자로 된 단어는 연상이 가능하다. 조합된 글자 중 하나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라면 '성자 프란시스코에서 딴 지명이겠구나.' 짐작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좀 본 입장에서'시즈오카는 조용한 곳이겠구나'라고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트빌리시'라는 단어에서는 어떤 힌트도 얻을 수 없다. 낯설고 처음 외우는 영어단어처럼 입에 붙지 않는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에서 틀린 영어 단어는 2층을 뜻하는'Upstairs'였다. 수십 번을 읽고 쓴 후에야 간신히 외울 수 있었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는 보름 가까운 여행동안 하도 많이 발음하여 익숙해진 경우다.
트빌리시는 비행기, 기차, 택시, 관광버스 등 조지아 곳곳으로 가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존재해서 우린 이곳을 경유지로 사용했다. 고르가살리 왕이 트빌리시는 수도로 삼은 이유는 단지 온천만은 아니었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는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진다. 북쪽 러시아와 인접한 우쉬굴리나 스테판츠민다를 다녀와서 트빌리시 숙소에서 쉬고 따뜻한 남쪽 시그나기로 출발했다. 시그나기에서 조지아 반대편에 있는 흑해와 인접한 바투미에 갈 때도 다시한번 트빌리시 숙소에서 쉬어갔다.
숙소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역사 깊은 이 도시를 즐기고 누볐다. 밤 골목을 걸어 야경이 멋진 성당에 찾아가고, 광장에서는 젊은이들이 댄스배틀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맛집이 즐비한 골목에서 육즙이 터져나오는 만두 힌칼리와 치즈를 얹은 빵 하차푸리를 먹었는데 한국에 와서도 종종 생각난다. 조지아 여행에서 쌓은 경험과 추억을 소환하려면 ‘트빌리시’라는 지명이 같이 따라온다. 그래서 어느새 이 어색했던 단어가 입에 붙었나보다.
여행은 나를 바꾼다. 다이소에서 만원으로 플렉스 하듯, 동남아나 환율 낮은 외국에서 허세 부리는 나였다. 스위스에서는 어림없을 비용으로 좋은 호텔과 음식을 누리면서 조지아를 낮춰보며 여정을 시작했다. 다행히 조지아를 비롯한 몇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 병은 고쳐지는 중이다. 조지아 양, 소, 돼지, 말, 개 들이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에서는 우리나라 동물복지를 생각한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 판단할 수 있다."라고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다. 조지아 인들은 동물을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대한다. 귀에 인식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람을 해치지 않고 곁에 머문다. 개들은 먹이를 조를지언정 사납게 달려들지 않는데, 아마 해꼬치 당한 경험이 극히 적어서 그러리라. 소와 말들이 석양 무렵에 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빗장을 건드리는 모습은 실컷 놀다 돌아와 대문 열어달라는 아이 같다.
내 고정관념을 바꾼 또 다른 경험은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얻었다. 7천 미터 탱그리산이 단군을 뜻하는 단어라는 사실에 ‘한반도만이 단군할아버지의 선택을 받을 것은 아니구나’라고 깨달았다. 단군신화를 읽고 우리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나에게 있었나보다.
조지아 시간으로 밤 10시에 도착하여 금세 숙소로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트빌리시 시내는 시위하는 군중으로 심한 교통정체를 겪고 있었다. 공항에서 우리가 예상한 금액보다 요금을 높게 부른 택시기사는 중앙선 침범하며 시간 단축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조금 덜 밉다. 그리고 시위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새로운 법 제정을 앞두고 러시아 자본이 조지아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라 했다. 드디어 첫날 숙소인 트빌리시 제타 호텔에 도착했는데 엘리베이터 없이 고풍스러운 돌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다른 택시를 타고 온 일행들이 옆 골목 어디엔가 내려져 데리고 오느라 입실이 더 늦어졌다. 방 배정받으며 공항에서처럼 대화하다 방문 열고 나온 투숙객의 항의를 받았다. 벌써 새벽 1시를 넘었다는 사실에 어글리코리안이라 생각할까 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쾌적한 기후와 깨끗한 침구 덕분인지 장거리 여행 피로가 싹 풀릴정도로 잘 잤다. 조식이 준비된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조지아에 올 때 기대했던대로 알찬 식탁이다. 싱싱한 과일과 유제품, 빵과 소시지가 종류별로 넉넉하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보다 먼저 호텔 밖을 나와 산책하는데 도시는 조용하면서 분주하다. 싱싱한 컵과일 파는 할머니와 손님 기다리는 택시기사들이 미소를 건넨다. 드디어 본격적인 조지아 여행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