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쉬굴리 쉬카라 트레킹
조지아의 4월. 남쪽 시그나기 포도나무는 이미 싹을 틔웠다. 면봉 같은 움이 나뭇가지에서 삐져나오면 농부들은 제일 튼실한 순만 남기고 나머지를 떼어내기 바쁘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크고 단맛이 풍부한 포도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북쪽 쉬카라의 목동들은 아직 빙하에 갇혀 얼음여왕이 다시 긴 수면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녀의 차가운 숨결에 캅카스 산맥은 온통 빙하로 얼어붙었다. 해발 3,000~5,000m 높이 산맥의 봉우리들은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고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캅카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겨우내 고립되는 스바네티 마을은 성마리아의 결계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다가 얼음여왕이 잠 들고나서야 비로소 푸른 초원 쉬카라로 다시 태어난다. 수개월동안 건초를 먹고 견디던 말과 양, 소 등 각종 가축들은 신선한 풀을 마음껏 뜯어먹을 수 있고, 칼라 계곡의 깨끗한 물을 마시며 살 찌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바네티 주민들은 얼음여왕을 두려워하고 조심할 뿐 싫어하지는 않는다. 성마리아의 결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적들을 막아주는 든든한 자연 방패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쉬바산에 살고 있다는 얼음여왕의 아름다움과 힘은 우쉬굴리 언덕 '성마리마'와는 또 다른 찬양의 대상이다.
조지아 여행에서 우쉬굴리 쉬카라 트레킹과 스바네티 마을 구경은 빼놓으면 아쉬운 코스다. 하지만 접근이 만만치 않아 매일 출발지인 매스티아 숙소의 창문을 열어보게 되었다. 구글 일기예보가 있지만 현지사정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가이드가 매스티아 지인에게 확인하면서 일정을 조정하는 상태였다.
다른 코스로 조지아 여행 중인 진희에게 날씨를 묻는 카톡이 왔다. 폭설로 길이 통제되어 숙소에 갇혔다는 것이다. 경유지 하나를 포기하고 모닥불 앞에서 불멍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지만 기약 없는 상황에 대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다행히 우리의 우쉬굴리 출발일에는 교통 통제가 풀렸다. 20명이 탈 수 있는 마슈르카로는 접근이 어렵고 작은 4인승 지프 SUV에 나눠 타고 출발하는데, 작은창자같이 꼬불거리는 산길이 뱃속을 뒤집는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짓인가? 우쉬굴리에 꼭 가야 하나?'
짜증이 몰려와 뒷 좌석에 몸을 깊숙이 눕히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다 어어~ 하는 소리에 창밖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얼었던 산이 우수수 부서지며 빙하수에 쓸려 내려오고 있었고, 차 한 대가 간신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를 타이어가 간신히 발을 걸치며 달리고 있었다.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상황이었다. '이건 실제상황이다!' 등을 시트에서 떼지 못하고 손만 간신히 움직여 안전벨트를 찾아 채웠다. '현지 가이드만 믿자. 자기도 살고 싶을 테니 알아서 운전 잘하겠지'
석탄처럼 시커먼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구간이 사라지고 갑자기 탁 트인 초원에 한가로운 풀을 뜯는 말들이 보였다. 소와 말들이 재갈이나 굴레 없이 돌아다니는데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동물의 낙원이네"
그리고 돌로 지은 집들과 코쉬키 탑이 옹기종기 모인 우쉬굴리 스바네티 마을이 보였다. 우린 드디어 성마리아의 안전한 결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탐색해 본다. 이날 일정은 빙하를 머리에 얹고 있는 쉬카라산을 따라 걷는 트레킹과 우쉬굴리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마을을 둘러보는 두 그룹으로 나눠보았다.
나는 당연히 트레킹 팀에 합류하였는데, 원점회귀한다는 말을 듣고는 걷다가 멈추었다. 푸른 벌판에 자리 잡고 준비해 온 화로대를 꺼내어 커피를 내려마시는데 눈앞엔 캅카스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온전히 혼자이고, 쉬카라 산에 안긴 듯 포근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작은 화로의 불이 꺼져갈 때쯤 어디선가 덩치 크고 순딩한 개 한 마리가 옆에와 앉았다. 마치 원래 일행같이 자연스럽게 구는 그 녀석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배낭엔 줄 것이 없었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마을로 향했다. 일행과 합류하여 뭔가 먹을 것을 시키면 이 녀석에게 줄 것이 생기겠지.
트레킹을 마치고 마을에 도착했을 땐, 성마리아교회에서 동네 주민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구경하는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먹을 것을 권하는데 답례로 드릴 것이 없어 조금만 먹었다.
성마리아교회는 해발 2,300m 고지대인 우쉬굴리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12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로 한 발이라도 더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높은 곳에 지었다고 한다. 동굴 같은 느낌의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성모마리아 그림 앞에 수많은 촛불이 밝혀져있다. 엄마와 함께 온 꼬마아이가 기도를 마치자, 우리를 데려다준 가이드도 라리를 촛불과 교환하더니 무언가 소원을 빈다. 주머니에 몇 라리를 가지고 다녔어야 하는데 소원을 빌지 못해 아쉬웠다.
교회 담장 안에는 세 개의 종이 달려있는데 함부로 치면 안 된다. 일정한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는 마을의 시계 역할을 하는데, 종이 울리면 마을 사람들은 기도하러 모인다고 한다.
영업하는 식당을 찾아 각자 취향대로 맥주와 와인, 하차푸리를 주문했다. 험한 길을 달려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고 입까지 즐거우니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옆 테이블엔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한가득이다. '아이를 데려오기엔 위험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비행기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단다. 겨울의 우쉬굴리는 스키 타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