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머리채와 루비 같은 뺨을 가진 타마르 여왕의 뒤에는 번쩍이는 칼과 방패, 창을 든 사자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도열했다.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시하라산은 빙하에 덮여있고, 적들은 산 너머에 군집했다는 소식이다. 여왕은 이 산을 넘어 인구라강을 타고 내려올 적들을 대비해 특별한 지원군을 소집했다. 이방인(적)들은 풍문으로 코쉬키 돌탑전사*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인지 한껏 두려워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거인병사는 평소엔 들판에 잠들어있다가 전쟁의 뿔나팔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그전까지는 양과 말이 마음껏 뛰어놀고 풀을 뜯을 수 있게 잠자코 머물면서 오히려 그들의 편안한 바람막이가 되어준다.
결전을 앞두고 소환된 코쉬키 돌탑거인들은 눈을 환하게 빛내고 "우워어~~" 고함을 내지르며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이 땅을 함부로 침범할 순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페르시아인들이 '왕이 미치면 조지아로 쳐들어간다'는 속담을 남겼을까?
* 코쉬키 ( 스반타워 Svan tower 라고도 부른다. 조지아 북서부 스바네티 지역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견고한 돌로 지은 탑 형태이며, 높은 층은 주변을 감시하고 활을 쏘는 등 공격과 방어 용도로 쓰였다. 중간층은 사람이 거주하고 1층은 축사와 창고로 사용했다. 적이 쳐들어오면 각자의 집인 코쉬키에 식량과 무기를 가지고 칩거하며 오랫동안 응전할 수 있었다. )
메스티아 마을의 코쉬키
비가 추적이는 메스티아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따끈한 하차푸리를 뱃속에 넣으니 힘이 났다.
'그저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여행의 일부인 휴식이다'라고 생각해보다가 수백만 원짜리 비행기표가격을 시간에 녹여보니 너무 비싼 휴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금만 쉬고 일단은 나가야겠다.
우비를 둘러쓰고 동료들과 메스티아 시내에 들어서니 '퀸 타마르 공항'가는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스키 렌탈숍, 환전소, 은행이 줄지어 서 있다.
오늘은 이 지역 공휴일이라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잠긴 문의 유리창 너머로 마음껏 훔쳐보며 구경하는 중이었다. 기념품숍은 스반타워 코쉬키 열쇠고리를 만들어놓았고, 전자제품 판매점은 예전 금성전파사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 그림이 붙어있고, 조지아 알파벳이 큼직하게 붙어있는 곳은 아마 유치원이나 학원이겠지.
저녁엔 와인바나 카페에 들르자는 의견이 모아져 후보지를 스캔 중이었는데 세련된 레스토랑이 보여 찜해놓았다. 옆 건물 점포는 작은 여행사인가 싶었는데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였다. 탄탄하게 돌로 지은 3층 건물로 나무 테라스는 세월에 변색되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몸을 기대어도 안전할 것 같아 보였다. 시외로 이동하는 마슈르카 한대가 서 있고 터미널 앞에 행선지가 적혀있었다. 트빌리시, 쿠타이시, 바투미, 주그디디, 우쉬굴리 등 그중 우리는 내일 우쉬굴리에 갈 예정이다. 우쉬굴리는 타마르 여왕의 지휘아래 코쉬키 돌탑 전사들이 적을 맞닥뜨린 최전방이었다.
메스티아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 입구에 카르틀리인들이 쓰던 전통 모자가 걸려있다. 관심가지고 살펴보는 걸 눈치챈 매표소 직원이 써보라며 권한다. '혹시나 팔려고 하는 건가?' 싶어 잠시 경계하다가 호기심에 써 보았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잘 어울린다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고 서툰 영어로 모자 색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나이별로 쓰는 색상이 다르다는 설명 같았다. 폰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전달할 방법을 찾다가 혹시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지 물었다. 다행히 계정이 있었고 서로 맞팔 한 후 DM으로 사진을 주고 받았다. 앞으로 그의 계정에서 조지아 현지 근황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 술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라 시내를 더 둘러보기로 하는데, 시청을 지나니 널찍한 세티파크 (seti park)가나타났다. 안쪽으로 숙박시설과 상점, 공연장이 어우러진 세티스퀘어가 있고, 광장에 타마르여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곡선이 아름답고 말안장 장식이 세심하지만 말을 너무 뚱뚱하게 표현했다는 불만도 있다. 짐작컨데 산악지역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신전에 모시는 까닭과 연관 있으리라.
중세 조지아 전성기를 이끈 타마르여왕을 칭송하는 이는 산악부족뿐만이 아니다. 조지아 정교회에서는 타마르여왕을 삼위일체 다음 네 번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조지아 인들이 국보처럼 사랑하는 장편 서사시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선정된 이 서사시는 쇼타 루스타베리가 궁정생활 중 집필해 여왕에게 바친 것으로, 시구는 조지아 인들의 삶에 녹아들어 있다. 초등학생들은 중세적 표현이 섞인 심오한 구절을 뜻도 모르고 암송하느라 고생하지만 평생 되뇌며 살고, 작품에 나오는 사랑을 표현하는 구절은 결혼식에서 낭독되고 부인이 남편에게 읽어주며 애정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