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게 대처하는 법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 보면 문화차이, 음식, 인종차별 등 별의별 일들을 겪게 된다. 나는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에서 유학 중이었고 현지 대학교의 보여주기식 대외 홍보물 제작 과정에서 서양인들과 아시아인의 불합리한 인종차별은 접했지만 중국 현지인들에게는 딱히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못했다.
음식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고 문제는 습관과 생각에서 오는 문화차이가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평소처럼 빔프로젝터와 컴퓨터를 켜면서 하나 둘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밝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피곤한데도 내 수업을 들으러 와주는 학생들의 정성이 참으로 고맙기도 하고 학생들의 컨디션을 확인할 수도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최대한 학생들과 스몰토크를 하며 인사를 한다.
중국은 크고 작은 기념일들이 많은데 사내에서는 특히 ‘어머니의 날’, ‘부녀자의 날‘(우리나라의 여성의 날과 비슷) 같은 여성을 위한 기념일에는 당일 점심 메뉴에 특식이 나온다던지, 여사원들에게는 특별히 꽃 한 송이를 전달하는 등 이벤트를 잊지 않는다.
잠시 후 나를 잘 따르던 여학생 몇몇이 점심때 받은 꽃을 들고 와 “선생님, 부녀자의 날을 축하합니다.”라며 나에게 줬다. 아니, 꽃이라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꽃선물에 설레기까지 하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남학생이 사내 커피숍에서 시원한 밀크티를 사가지고 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내미는 게 아닌가? 순간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은 엄연한 차별이라며 귀여운 불만을 토로했고 센스 넘치는 반장은 평소 지각을 하거나 게임을 하다 진 팀이 낸 학급비로 밀크티 파티를 하자는 제안을 하며 재치 있게 넘어갔다.
반장은 급하게 커피숍 직원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자 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 주제는 ‘한국의 전통음식과 한복’.
음식 부분은 수업 자료를 준비할 때 전혀 힘들지 않고 그날의 수업이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나의 최애 수업 소재이다. 교재를 펴고 김치의 종류와 만드는 과정 등을 한참 소개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딴지를 잘 걸던 남학생이 대뜸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얼굴로 툭 던진 한마디.
바로 그때다, 세상 어찌 그렇게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몇몇 학생들은 뜬금없이 수업 흐름을 뚝 끊는 남학생에게 짜증 섞인 눈초리로 째려보고 있었다.
(한중문화를 적절히 융합시킨 기업문화가 익숙한 한국법인 사원들은 역사나 문화 등 민감한 사안은 서로 존중하고 잘 건드리지 않는 분위기다.)
아니, ‘파오차이‘(泡菜paocai - 중국에서 한국의 김치를 보편적으로 일컫는 말)는 원래 중국 고유의 전통 염장식품이고, 김치는 중국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남학생이 강한 어조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교실 분위기는 삽시간 어수선해졌고 나는 어떻게든 재치 있게 이 난관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억측과 논쟁에 휘말려 수업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 여러분, 우리 지난 시간에 외웠던 문장 다시 한번 되새겨 볼까요? “
나는 전에 교재에 나왔던 문장이 순간 떠올라 큰소리로 선창 했다. “ 다른 나라의 문화는 “ , ” 이해하기보다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 모두가 고맙게도 이 문장을 외우고 있었고, 학생들은 무엇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나와 같은 안도의 마음이었을까? 순간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어 반문했던 남학생을 향해 ‘헛소리는 교실 나가서 하라’는 둥의 농담반 진담반 책망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나는 등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감추며 같이 웃었다.
휴…
외국에 나오면 여러 자기 문화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중국은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더 민감한 부분이 있다.
수업 도중에 농담으로 넘어온 말은 가볍게 받아주면 되고, 진지함이 요할 때는 수업이 끝난 후에 따로 소통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때 역사 얘기가 나오면 가뜩이나 안 되는 중국어로 논쟁을 벌이고 이를 악물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또한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많이 유연해졌다.
재치 있게 넘어가면 된다.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학습되어 온 다수를 1인 내가 대응하기란 내 역량으로는 벅차기도 했고 이보다 현재 관계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분명히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내 교실에서만큼은 그런 논쟁들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파를 나눈다든지 감정을 상하게 두고 싶지 않다.
매번 커리큘럼이 시작되는 첫날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약속한다.
우리는 즐겁고 재미있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웁니다. 역사 이야기는 교육장 밖에서
한국어를 전달하는 일 즉 가르치는 일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말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결국 사람과 문화가 섞이면서 파생되고 계속 발전해 간다. 그 나라의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 막연하게 언어를 접하게 되면 기계적으로 습득할 뿐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답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이 원활하게 소통되지 못한 채 오해하고, 왜곡되거나 단절될 수 있다. 언어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 이 업을 하면서 익숙해지는 것도 많지만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결국에는 사람이다. 언어는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더 유연해지는 법을 배우고 익히며 내일 수업을 준비한다.